2025年03月15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3月15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9章 13
〇讃 頌 讃頌歌 2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7 (四旬節 [4] )
〇讃 頌 讃頌歌 303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0章 29~34節
〇説 教 「神の憐れみが支配する世界
(하나님의 긍휼이 다스리는 세상)」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12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3月 1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憐れみが支配する世界」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0章29~34節
目の見えない二人が道端に座っていました。道端に座っていたのは、物乞いをしていたのです。彼らは普通に働くことが出来ません。目が見えないということで何も出来ないというわけ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当時のユダヤ社会は、目が見えない人から働く機会を奪い、社会的に排除される側に置いていたのです。彼らが出来ることと言ったら物乞いぐらいしかありません。
目の見えない二人はイエスさまの噂を聞き、藁をもすがる思いで、「主よ、ダビデの子よ、私たちを憐れんでください」(20節)と叫びました。しかし、群衆たちはそれを許しません。彼らはしかりつけて黙らせようとしました。
物乞いに関わりたくないと思ったのでしょうか。気が触れているとでも思ったのでしょうか。自分たちとは関係ないと思った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目の見えない二人の苦しみを理解出来なかったからでしょうか。
皆さんは、自分がそんな情けも憐れみもないような群集とは違うと思うかも知れませんが、私たちはそんな群集が形作る社会に生きているのです。その中の一人であることを忘れてはいけません。そんな群衆の中で、声を発するというのは、大変なエネルギーが必要なのです。それでも目の見えない二人は、さらに大きな声で叫びました。「主よ、ダビデの子よ、私たちを憐れんで下さい。」
イエスさまは、立ち止まり、二人を呼んで、「何をして欲しいのか」と言われました。二人は、「主よ、目を開けていただきたいのです」と答えますと、イエスさまは二人の盲人を深く憐れんで、その目に触れられました。すると、何と目の見えない二人は直ぐ見えるようになり、イエスさまに従うようになったのです。
ここで起こった出来事は、奇跡に満ちています。目が癒されたという奇跡。彼らの願いが叶えられたという奇跡。もちろんそういうこともありますが、何と言っても、私はこの目の見えない二人が、イエスさまに従ったという、奇跡を覚えたいのです。
聖書の物語では、イエスさまに従うことを当たり前のように捉えがちですが、イエスさまに従うということそのものが奇跡なのです。そして、そこに人間の求める、本質が隠されているのだと思います。
イエスさまは目の見えない二人の「憐れんで下さい」「目を開けていただきたいのです」という言葉を聴いてその通りにされました。その時、イエスさまは「深く憐れんだ」と記されています。この深く憐れむと言う言葉は、ただ、かわいそうだと思うことではなくて、悲しくて内臓がよじれる痛みを伴う、深い憐れみを意味しています。すなわち、イエスさまのこの深い憐れみが、目の見えない二人に与えられたのです。
目の見えない二人は人に頼るしか生きる術がありません。しかし、この世の人々は彼らに無関心であり、この二人に触れれば汚れると思っています。そんな人々に自分の本当の気持ちを訴えることも出来ません。そのため、人に期待し信じることなど出来ないほど彼らの心は閉ざされていました。彼らに対する世間の無関心がそうさせていました。
しかし、イエスさまは目の見えない二人を深く憐れみ、彼らに深く関わろうとされました。汚れるとして、誰も彼らに触れる人はいないのに、イエスさまは彼らの目に触れられました。その時、彼らの目は見え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そして、それは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だけではなく、彼らの心の目、閉ざされていた心の扉が開いたのです。
彼らがイエスさまに従って行ったのは、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感謝の御礼としてではなく、深く憐れんでいただいたことに、何かしら、自分の全人生をかけてもいいという、強い、深い、信頼感が生れたからだと思います。目の見えない二人は、イエスさまの深い憐れみに頼った生き方をしていこうと喜んで決意した、彼らにとってはまさに奇跡が起こっ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は目の見えない人の叫びを聞き、様々な不自由と痛み、差別を想像しました。そして、その痛みを自分の内側の痛みとして感じたのです。「私たちの悲しみをわかって欲しい」と叫ぶ人たちを前にして、「ああ、あの人はかわいそうだ」と思っただけにとどまらなか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その悲しみを受け止め、自分のことのように共感し、どうにかしたいと突き動かされていったのです。
このイエスさまの思いが彼らに伝わり、癒やされ、目が見えるようになっただけでなく、救われ、彼らの心が開かれました。そして、彼らはイエスさまに従ったのです。
おそらく私たちは皆、目の見えない二人ほどではないにしても、日常、たくさんの不自由さを抱えて生きています。また、それと同時に色々な願いや希望を持って暮らしています。そして、それが実現されない事に不満や不平や不安を抱えながら暮らしているかと思います。
それはイエスさまについてきたたくさんの群衆も同じでした。その群衆の中にいる私は、イエスさまを信じると言いながらも、目の見えない人のような物乞いをするような人とはあまり関わりたくないと思うような冷たい人間です。
しかし、イエスさまに従って行くとき、群衆は、イエスさまの目の見えない人への深い憐れみと癒しを経験してしまいます。まさに神さまの奇跡の中に関係つけられてしまいます。イエスさまに従って歩まされるとき(これ自体奇跡なのですが)、イエスさまの奇跡の業に巻き込まれていくのです。
私たちは信仰を持っていると言っても、自分の本当の思いを誰にも言えず、不平不満、不安や恐れを抱えています。そんな私たちをイエスさまは天の国、神の国へと連れて行ってくださるのです。いえ、信仰によって気付きさえすれば、今、私たちは天の国、神の国にいることを確認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人はイエスさまの深い憐れみを本当は求めているのに、違ったものを求めてしまっています。私たちが本当に求めているのは、イエスさまの深い憐れみです。イエスさまに従うことです。イエスさまに従うと言うことは、イエスさまの一方的な深い憐れみを、ただただ、感謝して受けていくことです。
皆さん、私たちが本当に神さまにして欲しいと思っていること、それは、深く憐れんでもらうことだということを覚え、すでに、もう、憐れんで下さっているイエスさまに従って行きたいと願います。
【2026년 3월 15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긍휼이 다스리는 세상”
마태복음 20장 29~34절
눈먼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이 길가에 앉아 있었던 것은 구걸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눈먼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배제된 자리에 놓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구걸하는 것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이 눈먼 두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20절)
그러나 무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꾸짖으며 잠잠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구걸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눈먼 두 사람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여러분은 자신이 그렇게 정이 없고 긍휼이 없는 무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런 무리가 만들어 낸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무리들 속에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대단한 에너지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먼 두 사람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두 사람은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깊이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눈먼 두 사람은 곧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기적으로 가득합니다. 눈이 고침을 받은 기적,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기적. 물론 그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는 이 눈먼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기적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인간이 진정으로 구하고 있는 본질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두 사람이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말을 들으시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때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단순히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슬픔 때문에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동반하는 매우 깊은 긍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깊은 긍휼이 눈먼 두 사람에게 향했던 것입니다.
눈먼 두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무관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지면 더러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짜 마음을 호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은 사람을 기대하고 믿는 것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닫혀 버렸습니다. 그들을 향한 세상의 무관심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눈먼 두 사람을 깊이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에게 깊이 다가가려고 하셨습니다. 더러워진다고 생각하여 아무도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않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육신의 눈이 보이게 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눈,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단지 눈을 뜨게 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깊이 불쌍히 여기신 그 긍휼 속에서, 자신의 인생 전체를 맡겨도 좋겠다는 강하고 깊은 신뢰가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먼 두 사람은 예수님의 깊은 긍휼에 의지하여 살아가겠다고 기쁨으로 결단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의 외침을 들으시고, 그들이 겪어 온 여러 가지 불편함과 고통, 그리고 차별을 떠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자신의 내면의 고통처럼 느끼셨습니다. “우리의 슬픔을 알아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시며 단순히 “저 사람 참 불쌍하다”라고 생각하는 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슬픔을 받아들이시고, 자신의 일처럼 공감하시며,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움직이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이 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치유를 받고 눈이 보이게 되었을 뿐 아니라, 구원을 경험하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아마 우리도 눈먼 두 사람만큼은 아닐지라도, 일상 속에서 많은 불편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 가지 소망과 기대를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불만과 불평, 불안 속에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던 많은 무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무리 속에 있는 저 역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눈먼 사람처럼 구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가능하면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차가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갈 때, 무리는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에게 베푸신 깊은 긍휼과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 속에 관계 맺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걷게 될 때(이것 자체도 기적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의 역사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짜 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하나님 나라, 곧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아니, 믿음으로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예수님의 깊은 긍휼을 갈망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것들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깊은 긍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일방적인 깊은 긍휼을 그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정말로 바라며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깊이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 곧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우리를 깊이 불쌍히 여기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의 긍휼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