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年04月26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4月1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コリント一(고인도전서) 4章 1~2節
〇讃 頌 讃頌歌 31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8 (詩編 31編 )
〇讃 頌 讃頌歌 151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1章 33~46節
〇説 教 「人が捨て、神がそれを拾う
(사람이 버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집으신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20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4月 2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人が捨て、神がそれを拾う」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1章 33~46節
今日の聖書箇所は、「ぶどう園と農夫のたとえ」です。この譬え話の意味することは、皆さん、読んですぐにお分かりなるかと思います。
私たちは、ここに登場するぶどう園の農夫たちが、主人に逆らう全く以て悪人であると判断します。そんな農夫たちは懲らしめ罰しなければならない。そして、主人の命令に従う農夫たちを雇うと考えます。祭司長や長老たちが答えた通りです。本来なら、それが正解です。問題は、その悪い農夫たちが、まさにあなたたち祭司長や長老たちであるとイエスさまは指摘しておられるのですが、さすがに自分の罪に鈍い祭司長や長老たちも、これは自分たちを批難していることに気付きます。祭司長や長老たちは、ここで自分たちの罪に気付き、悔い改めれば良かったのですが、自分たちが批難されたことに憤慨し、イエスさまを捕らえようと考えますが、群衆の反感を恐れて、捕らえることが出来ませんでした。
私たちはここに、祭司長や長老たちの愚かさ、罪深さを感じ、そのような者たちから神の国の恵みが取り去られるのは当然だと思います。ただ、この譬え話は、祭司長や長老たちに自分たちの罪を気付かせる目的だけで語られたも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これからなされる神さまの救いの御業、ぶどう園という神の国というものが、どういうものかを教えておられるのです。
それにしても、このぶどう園の主人は、善意に満ちていると言いますか、信じられないくらいのお人好しです。僕たちが、石打たれ殺されても、今度こそはと、何度でも武器をもたない僕たちを送り、農夫たちと交渉しようとしています。農夫たちは明らかに大罪を犯しています。主人の権力を行使すれば、農夫たちを処刑にすることも奴隷にすることも出来たはずです。それなのにぶどう園の主人は農夫たちに対して忍耐深く、農夫たちが正しい態度をとるのを待ち続けました。真に忍耐深く、憐れみ深い主人です。この譬え話を聴いていた人たちは、この主人はお人好しのバカもいいところ、こんな主人いるわけがない、と思ったことでしょう。実際いることも気づかずにです。
そして、このぶどう園の主人は最後に自分の息子を送りました。この息子こそ、イエス・キリストご自身を表しています。この譬えにおいて、息子は捕まえられ、ぶどう園の外に追い出され、殺されます(39節)。これは一つの預言となっており、キリストはぶどう園の外、すなわちエルサレム郊外で十字架につけられ殺されます。主人である父親は、息子の身に危険が及ぶことを承知していながら、和解の使者として遣わしたのです。
実際、イエスさまは、この三日後に、人々から見捨てられ、十字架につけられることになります。イエス・キリストは捨てられた石となり、十字架の上で私たちの罪に対する神さまの怒りを全身全霊で受け止められ、黄泉の世界にまで下られることになります。しかし、イエスさまは死の支配を打ち破られ、甦り、救いの岩であることを証明されました。そのことがイエスさまがお語りになった42~43節の言葉の意味なのです。
42節の言葉は、詩編118編22~23節の引用です。これは神殿のことが想定されておりますが、神殿すなわち神の国を建てるために選ばれた神の民たちが捨てた石が、神の国の最も大事な基礎となり、救いの岩となったことが言われています。それは、キリストの十字架は私の罪のためと信じる者に救いが与えられ、神の国の一員と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こんなこと人間の誰もが思いつかなかった、不思議な不思議な神さまの御計画でした。
しかし、神の国を支配する中心的存在となると考えていた祭司長や長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を見捨て、十字架に架けてしまい、反対に、彼らは神の国の外に追いやられることになります。それは救いを失うということであり、罪を悔い改めない者たちが入る暗黒の世界に、裁きとして投げ込まれるということです。そのため、「神の国はあなたたちから取り上げられ、それにふさわしい実を結ぶ民族に与えられる」(43節)と言われています。
ここで言われている「民族」とは誰なのかと言いますと、救いの岩となられた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者たちで構成される新しいコミュニティー、神の家族のことです。すなわち教会のことです。
私たちは、幸いにも神さまの家族としてここにいます。そのため、イエスさまの譬え話をどこか他人事のように聞いてしまいます。しかし、この譬え話は私たち一人一人に向かって語られている譬え話でもあるのです。
祭司長や長老たちは、イエスさまから自分たちが問われているのに、他人事のようにこの譬え話を聞いていました。自分たちが譬え話に出てきた農夫たちのようなことをしてきたのに、そのことになかなか気付きません。私たちも、農夫たちのような者です。なぜなら、私たちは、ぶどう園、つまり、この世界をお造りになり、支配しておられる方である神さまを、その方の御子イエスさまを無視して、自分が主人であるかのようにして生きてきた者だからです。
いいえ、私たちはイエスさまを信じた今もなお、そのように生きてしまうこと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私たちはイエスさまを信じたというこの恵みだけで満足し、自分たちが特別な存在になったかのように勘違いをしてしまってはいないでしょうか。
私たちがこの恵みに与ったのは、全ての人々に与えられた神の救いの福音を伝えるためなのです。イエスさまが痛みを負って、十字架にかかり、命を献げたのは、この私たちの勘違いをはっきりと正して下さろうとしたのです。
ですから、私たちも神さまの前に立つ時、一人の罪人であることを認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して、罪人である私のために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り、「隅の親石」教会の基礎となって下さったことを感謝し、その教会の一員として、私たちは自分の役目を全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もし私たちが、自分自身を若いから、あるいは年老いたから、まだ何も分からないからと思っていたとしても、神さまはそのような人を用いられ、活かす方であること覚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さまは人が「捨てた石」をもっとも大切な「隅の親石」となさるのです。
神さまは得意なものではなく、不得意なものをあえて用いることによって、人の能力によるのではない、神さまの働きを明らかにされる方です。「できない」と思うものにこそ与えられる、まさに人の目には「不思議」に見える神さまからの使命に、私たちはひるまずに応答する者でありたいと願います。
【2026년 4월 26일 주일예배(요약판)】
“사람이 버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집으신다”
마태복음 21장 33~46
오늘의 성경 본문은 ‘포도원과 농부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여러분도 읽으시고 바로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기 등장하는 포도원의 농부들이 주인에게 거역하는, 참으로 악한 자들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런 농부들은 징계하고 벌해야 하며,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농부들을 새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대답한 것과 같습니다. 본래라면 그것이 정답입니다.
문제는 그 악한 농부들이 바로 당신들, 곧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라고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자기 죄에 둔감했던 그들도 이것이 자신들을 비난하는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했어야 했지만, 도리어 비난받은 것에 분노하여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의 반감을 두려워하여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어리석음과 죄 깊음을 느끼며, 그런 자들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은혜가 거두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단지 그들에게 자기 죄를 깨닫게 하려는 목적만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곧 포도원으로 비유된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참으로 선의에 가득 찬, 믿기 어려울 만큼 마음 좋은 사람입니다. 종들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해도, 이번에는 잘 될 것이라 여기며 무기를 들지 않은 종들을 계속 보내어 농부들과 화해하려 합니다. 농부들은 분명 큰 죄를 범했습니다. 주인이 권력을 행사했다면 그들을 처형하거나 종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포도원 주인은 그들을 향해 오래 참으며, 그들이 올바른 태도로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참으로 인내와 자비가 깊은 주인입니다. 이 비유를 듣던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주인은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이라며, 현실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계심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포도원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냅니다. 이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 비유에서 아들은 붙잡혀 포도원 밖으로 쫓겨나 죽임을 당합니다(39절). 이는 하나의 예언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포도원 밖, 곧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나타냅니다. 주인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화해의 사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로부터 사흘 후,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버림받은 돌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온몸으로 받으시고 음부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구원의 반석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42〜43절의 의미입니다.
42절의 말씀은 시편 118편 22〜23절의 인용입니다. 이는 성전을 염두에 둔 말씀으로,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 버린 돌이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어 구원의 반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의 죄를 위한 것임을 믿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이 결코 생각해 낼 수 없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될 것이라 여겼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이는 곧 구원을 잃는 것이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들어가는 어둠의 세계로 심판을 받아 던져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3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백성’은 누구인가 하면,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동체, 곧 하나님의 가족을 가리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가족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를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듣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우리 각자 자신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이 책망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남의 일처럼 들었습니다. 자신들이 바로 그 농부들과 같은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러한 농부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을 무시하고,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살아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살아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구원받았다는 은혜에만 만족하여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이 은혜를 받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생명을 내어주신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착각을 바로잡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한 사람의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교회의 기초가 되어 주신 것을 감사하며, 그 교회의 한 지체로서 각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혹 우리가 자신을 젊다고, 혹은 늙었다고,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긴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사용하시고 살리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버린 돌’을 가장 귀한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하는 것을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것을 사용하심으로써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여기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어지는, 사람의 눈에는 신비롭게 보이는 하나님의 사명 앞에,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응답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