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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年04月1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4月1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34編 18(17)~19(18)節
〇讃    頌    讃頌歌 2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6 (詩編 28編 )
〇讃    頌    讃頌歌 270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1章 23~32節
〇説   教    「後で考え直して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24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4月 1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後で考え直して」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1章 23~32節


 イエスさまは、祭司長と長老たちに、このような譬え話をされました。
 ぶどう園の主人である父が二人の息子に「今日、ぶどう園に行って働きなさい」と言います。一人の息子は「いやです」と答えますが、後で考え直してぶどう園に行きます。それに対し、もう一人の息子は「お父さん、承知しました」と答えますが、ぶどう園に行きませんでした。
 このような譬え話なのですが、イエスさまは、「どちらが父親の望みどおりにしたか」と祭司長や長老たちに問われました。
 祭司長や長老たちは、はっきりと「後で考え直してぶどう園に行った方です」と答えました。彼らは父の望みに応えているのが、ぶどう園に出かけることのなかった息子ではなく、「後で考え直して」ぶどう園に出かけた息子の方であるとよく分かっております。しかし、問題なのは、自分たちが「はい、行きます」と答えてもぶどう園に行かなかった息子であることに気付いていないことなのです。
 そして、この譬え話を聞く私たちも、自分たちが祭司長や長老たちと同じであると気付かないことに問題があるのです。


 この譬え話は、ぶどう園の主人である父親が、天の父なる神さまを意味し、二人の息子が神さまの子どもとして選ばれたイスラエルの人々を意味しております。ただ、息子であるイスラエルの人々には二通りの人たちがおりました。
 一人は、「はい、承知しました」と答えましたが、ぶどう園に行かない人々です。すなわち、口先だけで真の服従がない人たちですね。それが祭司長や長老たちでした。
 それから、もう一人は、「いやです」と答えたものの「後で考え直して」ぶどう園に行った人々です。彼らは「いやです」と、父親に対し面と向かって拒絶しています。そんな彼らことをイエスさまは、徴税人や娼婦たちと言っています。
 しかし、驚くべきことに、その徴税人や娼婦たちの方が、祭司長や長老たちより先に神の国に入るだろう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


 徴税人というのは、ローマのために働いている売国奴、ユダヤの裏切り者と呼ばれておりました。徴税人の中には、不正な取り立てをする者もいて、ユダヤの人々の間では、評判が良くありません。また、娼婦たちについても、不品行な人たちと見られておりしました。そうしなければ生きて行けないとか、そこには様々な事情があったのでしょうが、彼らは、確かに、不純な態度と言葉で、真っ向から神さまの思いとはかけ離れた生活を繰り返してきた罪人であったのです。
 しかし、彼らはバプテスマのヨハネが来て、「義の道を示した時」すなわち、救いの道を示した時に、徴税人や娼婦たちは、罪からの救いということを真剣に求め、悔い改め、イエス・キリストを救い主として受け入れました。それが「後から考え直して」という意味です。彼らこそ、神さまの招きに「後で考え直して」ぶどう園に出かけた人たちであ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彼らがかつて吐いた言葉、かつて抱いた汚れた思い、かつて犯してしまった振る舞いを問題と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ただ、「後で考え直して」従ったかどうかなのです。


 一方、祭司長や長老たちは、社会的にも、宗教的にも、指導的な人たちであり、また、その多くが律法に忠実であることを求め、真面目に生きてきた人たちでした。それゆえに、自分たちこそ、神の国に最初に入る資格をもった者であると自負しておりました。
 しかし、彼らはバプテスマのヨハネもイエス・キリストも救い主として受け入れませんでした。そのために、徴税人や娼婦たちの方が、あなたたちより先に神の国に入ると言われたのです。


 ただ、ここでイエスさまは、祭司長や長老たちを断罪しておら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たちより先に神の国に入るだろう」と、頑なな彼らが後から入るとは保証してはおりませんが、絶対に入れないとは突き放してもおりません。イエスさまは彼らが悔い改めるのを待ち続けておられ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この譬え話を聞いて、気付いて欲しい、考え直して欲しいと願いながら語っておられるのです。


 皆さん、イエスさまのこの譬え話で、一番正しい息子というのは、「ぶどう園に行って働きなさい」と父親に言われた時に、すぐに「はい、承知しました」と言って、喜んでぶどう園に行く息子ですよね。でも、イエスさまはこの譬え話に三人目の息子は登場しません。なぜ、イエスさまの譬え話の中に三番目の息子が登場しないかと言いますと、イエスさまがこの世の中を見たときに、三番目の息子がいないからです。

 私たちは、自分の振るまいを「有言不実行」「有言実行」「不言実行」「不言不実行」などと並べ立て、あれとこれを比較して、こちらの方がましだというようなことを語りますけども、イエスさまはそのようなことを言われ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
 ただ、深い憐れみの中で、罪人を赦し、神さまの愛の世界へと招いておられるのです。だからこそ、「従います」とイエスさまに直接誓いながらも従うことの出来なかった弟子たちを憐れんでおられます。その弱さのゆえに犯してしまう過ちを赦して、再び招いておられます。
 そして、今もなお、自分の姿が見えず、分からず、正しい自分にしがみついている祭司長たち長老たちにこそ、イエスさまは「後で考え直した」徴税人や娼婦たちの恵みの姿を語っておられるのです。


 皆さん、イエスさまはただ一点、「後で考え直すこと、悔い改めて出かけて行くこと」、このことだけを問題とされたのです。「時は満ち、神の国は近づいた。悔い改めて福音を信じなさい」(マルコ1:15)という福音を受け入れたかどうか。この福音に従って、仕えていくように立ち上がったかどうか。これが唯一の分岐点なのです。
 これが神さまの望みであると、これからどうするのかが大事であると、イエスさまは祭司長や長老たちに語っておられるのです。


 この二人の息子、「兄」も「弟」も、父親の思い通りに従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 それにもにも拘わらず、イエスさまは「後で考え直して信じるなら、神の国に入る」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主は打ち砕かれた心に近くいまし/悔いる霊を救ってくださる」(詩編34:19)のです。私たちは、この恵みの中に生かされ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子よ、今日、ぶどう園へ行って働きなさい」と、私たちに言われております。今日、今、ぶどう園へ行って働くようにと言われたのです。この、今日、ぶどう園へ行って働く、というのは、私たちが「今日、今、信じる」ということが言われているのです。
 神さまが求めておられる信仰というのは、昨日の信仰ではありません。明日の信仰でもありません。今日の信仰、今の信仰を求めておられるのです。
 今日、神さまを信じましょう。今日、神さまに従って行きましょう。


【2026년 4월 19일 주일예배(요약판)】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마태복음 21장 23~32절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라고 말합니다. 한 아들은 “싫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포도원에 갑니다. 반면 다른 아들은 “아버지,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실제로는 포도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였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분명하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간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뜻에 응답한 사람이, 가지 않은 아들이 아니라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간 아들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들이 바로 “가겠습니다”라고 말만 하고 가지 않았던 아들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듣는 우리 또한, 자신이 그들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 하나님을 의미하며, 두 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예,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포도원에 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즉, 말뿐이고 참된 순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다른 한 부류는 “싫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포도원에 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세리와 창녀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세리와 창녀들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리는 로마를 위해 일하는 매국노, 유대 민족의 배신자로 여겨졌습니다. 그중에는 부당하게 세금을 거두는 사람도 있어,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또한 창녀들 역시 부도덕한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뜻과는 멀리 떨어진 삶을 반복해 온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례 요한이 와서 “의의 길”을 보여 주었을 때, 곧 구원의 길을 제시했을 때, 진지하게 죄 사함을 구하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중에 생각을 바꾸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응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과거에 했던 말이나, 품었던 더러운 생각이나, 저질렀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나중에라도 돌이켜 순종했는가”를 보셨던 것입니다.


  반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지도자였으며, 율법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례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정죄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보다 먼저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이 나중에 들어갈 것이라고 보장하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결코 들어갈 수 없다고 단정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깨닫고, 생각을 바꾸기를 바라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에서 가장 바른 아들은 “네,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기쁨으로 즉시 포도원에 가는 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에는 세 번째 아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그런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두고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 “말한 대로 실천한다”, “말없이 실천한다”, “말도 행동도 없다” 등으로 나누어 비교하며,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비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깊은 긍휼 가운데 죄인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도 따르지 못했던 제자들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 연약함 때문에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시고,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붙들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나중에 생각을 바꾼” 세리와 창기들의 은혜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단 한 가지를 문제 삼으셨습니다. “나중에라도 생각을 바꾸는 것, 회개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라는 말씀을 받아들였는가, 그리고 그 복음에 따라 일어나 순종하며 살아가는가, 이것이 유일한 갈림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두 아들, 형도 아우도 모두 처음부터 아버지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나중에라도 돌이켜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편 34:18).
  우리는 이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아이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이 “오늘”은 바로 지금, 하나님을 믿으라는 초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어제의 믿음도, 내일의 믿음도 아닙니다. 오늘의 믿음, 지금의 믿음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읍시다. 오늘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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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6年04月19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