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年03月22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3月22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ゼカリヤ書(스가랴) 9章 9節
〇讃 頌 讃頌歌 26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8 (四旬節 [5] )
〇讃 頌 讃頌歌 140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1章 1~11節
〇説 教 「小さな子ろばは、私自身です
(작은 나귀 새끼는 바로 나입니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15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3月 2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小さな子ろばは、私自身です」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1章 1~11節
イエスさまと弟子たちの一行は、エルサレムに近づいた時、ベトファゲというところで、二人の弟子を使いに出します。この弟子たちにこのように言われました。「向こうの村へ行きなさい。するとすぐ、ろばがつないであり、一緒に子ろばのいるのが見つかる。それをほどいて、わたしのところに引いて来なさい。もし、だれかが何か言ったら、『主がお入り用なのです』と言いなさい。すぐ渡してくれる。」(2-3節)
イエスさまは、二人の弟子に、自分のために子ろばを連れて来るようにと言われました。
この「二人の弟子」が誰なのか、聖書には記されていませんが、私はこの二人が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ではないかと思っています。この二人は、先々週、読みました20章20~28節のところで、母親と共にイエスさまに「(イエスさまが)王座にお着きになるとき、この二人の息子が、一人はあなたの右に、もう一人は左に座れるとおっしゃってください」(20:21)と願いました。
しかし、イエスさまは「あなたがたの中で偉くなりたい者は、皆に仕える者になり、いちばん上になりたい者は、皆の僕になりなさい。人の子が、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仕えるために、また、多くの人の身代金として自分の命を献げるために来たのと同じように」(20:26-28)と言われました。それはイエスさまご自身が仕える者として、僕としておいでになったからでした。
そうです。イエスさまは仕えるために私たちのもとに来られました。イエスさまを信じる者として、私たちが互いに仕えるところに、神の国はあ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そのことをもう一度、ヤコブとヨハネに深く理解させるために、エルサレム入城の際に御自身が乗られる子ろばを用意させのにこの二人を使いに出したのでしょう。
ところで、遣わされた弟子たちは、イエスさまが「なぜ、子ろばを連れて来るように言われたのだろう」と不思議に思ったかもしれません。それは、聖書の言葉が実現するためでした。4節に「それは、預言者を通して言われていたことが実現するためであった。『シオンの娘に告げよ。見よ、お前の王がお前のところにおいでになる、/柔和な方で、ろばに乗り、/荷を負うろばの子、子ろばに乗って。』」(4-5節)とあります。
この言葉は、イザヤ書62章11節とゼカリヤ書9章9節の言葉が引用されています。ここに記されていることは、王がおいでになること、その方は柔和な方でろばの子に乗ってやって来る、ということです。「柔和な方」というのは「へりくだった方」とも訳される言葉です。主は、へりくだった方としておいでになったのです。
この子ろばは、マルコによる福音書やルカによる福音書によれば、まだ人を乗せたことのない未経験な、未熟なろばです。それが何の役に立つのでしょうか。7節に「ろばと子ろばを引いて来て」とあります。子ろばだけでなく、もう一頭のろばも連れて来たことになります。この子ろばだけでは心許ないわけですね。もしかしたら、助けが必要なわけですよ。しかし、イエスさまはこの子ろばを「主がお入り用なのです」(3節)と用いられるのです。
そして、この子ろばは、主の弟子たちのことを示しております。弟子たちはまだ未熟です。何の役にも立たないように見えます。しかし、イエスさまはその弟子たちを用いられるのです。それは私たちも同じです。私たちは、子ろばのような者であり、また子ろばを助け、支えるろばのような者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いよいよイエスさまはこの子ろばに乗ってエルサレムに入城されます。軍馬ではなく荷物を載せるろば、しかも小さな子ろばに乗ったイエスさまを見て、人々は驚きました。「何だ、あれは」と嘲笑するかと思いきや大勢の群衆が、「自分の服を道に敷き」「木の枝(棕櫚の枝)を切って道に敷き」、「ホサナ」と叫びました。
「自分の服」とは、恐らく「上着」のことでしょう。この上着はユダヤ人にとって大切な意味を持っています。律法に規定されている最後まで守られるその人の財産です。借金で全ての財産を取られても上着だけは「奪ってはならない」と守られているものです。いわば、その人の尊厳を表すものでした。その上着を道に敷き、その上を通らせるというのは、自分自身を献げる絶対服従を意味していたのです。
また、「棕櫚の枝を道に敷く」というのは、戦いに勝利した王を迎える時に行い、神さまの祝福を喜び祝うことの象徴でした。
そして、「ホサナ」というのは、神さまへの讃美や喜びを表す言葉でありますが、その本来の意味は「どうか救ってください」という意味です。
まさに、群衆たちは小さな子ろばに乗り、僕として仕える姿を示すイエスさまを救い主(メシア・キリスト)として喜び迎えたのです。
しかし、この群衆たちは本当のところ何も理解していなかったでしょう。よく分からないまま、小さな子ろばに乗るイエスさまに向かって「ホサナ。私を救って下さい」と叫んだのです。この後、自分たちの罪を背負って十字架に架かって死ぬなんて知りません。ましてや、その小さな子ロバが自分だなんて分かりません。しかし、確かに彼らは「ホサナ。私を救って下さい」と叫んだのです。
日本の教会には、洗礼も受けないまま求道生活を長く続けてる人がいます。自分が洗礼を受けるには、まだ確信が持てないとか、クリスチャンとして立派な行いが出来ないとか、色々と理由はあるようですが、「自分が」と何事も自分中心に考え、自分の成長を待っていたら誰も洗礼は受けられません。
皆さん、私たちは小さな子ろばに過ぎません。誰かの助けが必要な役に立たない者です。それでも「主がご入り用なのです」と用いられようとされるのです。
洗礼というのは、悔い改めて新たに生まれ変わることを意味しますが、私はそのことよりも主イエスさまを自分の背に乗せ、イエスさまが行かれるところに自分も行くと決心をすることだと思っています。その決心は自分にとっては大きな決断です。一大決心と言っても良いでしょう。
でも、後でふり返ったら、小さな決断だったと思わされます。なぜかと言いますと、イエスさまを背に乗せて歩んでみると、その都度、小さな決断を迫られます。私たちは祈りながら、主の御旨はどこにあるのか、その都度、決断し、歩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時には、間違うこともあるでしょう。でも、大丈夫です。自分の背にはイエスさまがおられるからです。その時にはイエスさまが私を背負ってくださるからです。
それがクリスチャンの歩む姿です。その歩む姿を見て、いえ、私の背に乗るイエスさまを見て、人々は「ホサナ。私を救って下さい」と神さまに立ち返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ヤコブやヨセフに小さな子ろばに乗る自分の姿をその目に焼き付けて欲しかったのでしょう。私が乗る小さな子ろばはあなただ、と。実際に、このことが彼らに分かるのは、もう少し後の話になります。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る時には、彼らは逃げ出してしまいました。それでも、イエスさまは小さな子ろばとして弟子たちを用いようとされました。弟子たちは復活されたイエスさまと出会って、自分が小さな子ろばと自覚し、イエスさまを背に乗せて、イエスさまと共に歩む決心をし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と共に歩む道は十字架の道です。自分を小さくし、人に仕える道です。イエスさまを背に乗せて、他にも多くの荷を乗せて歩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しかし、その荷は少しも重くありません。なぜなら、イエスさまが共にそれを担って下さるからです。そして、その道は、永遠の救い、命につながる道だからです。
【2026년 3월 22일 주일예배(요약판)】
“작은 나귀 새끼는 바로 나입니다”
마태복음 21장 1~11절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벳바게라는 곳에서 예수님은 두 제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2-3절)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자신을 위해 나귀 새끼를 데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제자”가 누구인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저는 이 두 사람이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은 몇 주 전에 읽었던 20장 20~28절에서,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0:21)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6-28)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섬기는 자로, 종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서로 섬기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야고보와 요한에게 다시 깊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자신이 타실 나귀 새끼를 준비하게 하시며 이 두 제자를 보내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은 “왜 나귀 새끼를 데려오라고 하셨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땄도다.”(4-5절)
이 말씀은 이사야 62장 11절과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것은 왕이 오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온유한 분으로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분”이라는 말은 “겸손한 분”으로도 번역되는 말입니다. 주님은 겸손한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나귀 새끼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따르면 아직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경험이 없는 미숙한 나귀였습니다. 그런 나귀가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7절에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귀 새끼만이 아니라 또 한 마리의 나귀도 함께 데려왔습니다. 이 작은 나귀 새끼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도움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나귀 새끼를 두고 “주가 쓰시겠다”(3절)라고 말씀하시며 사용하십니다.
이 나귀 새끼는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미숙합니다. 아무 쓸모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작은 나귀 새끼와 같은 존재이며, 또한 그 나귀 새끼를 돕고 지지해 주는 나귀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마침내 예수님은 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군마가 아니라 짐을 싣는 나귀, 그것도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저게 무엇인가” 하고 비웃을 것 같았지만, 많은 무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호산나”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의 겉옷”은 유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해 끝까지 보호되는 개인의 재산이었습니다. 빚 때문에 모든 재산을 빼앗기더라도 겉옷만큼은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사람의 존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겉옷을 길에 펴고 그 위를 지나가게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치는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나뭇가지” 즉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왕을 맞이할 때 행하던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호산나”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본래의 뜻은 “부디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때 사람들은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종의 모습으로 섬기시는 예수님을 구원자, 곧 메시아 그리스도로 기뻐하며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무리들은 사실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잘 알지 못한 채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후에 자신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 작은 나귀 새끼가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은 “호산나,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일본 교회에는 세례를 받지 않은 채 오랫동안 구도의 삶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세례를 받기에는 아직 확신이 없다고 하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 훌륭한 삶을 살 자신이 없다는 등 여러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라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성장을 기다린다면, 누구도 세례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작은 나귀 새끼에 불과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별 쓸모 없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쓰시겠다” 하시며 우리를 사용하시려 하십니다.
세례란 회개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보다도 주 예수님을 내 등에 모시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으로 나도 함께 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심은 우리에게 매우 큰 결단입니다. 인생의 큰 결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면 그것이 작은 결단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등에 모시고 살아가다 보면, 그때그때 작은 결단들을 계속 요구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매번 분별하고 결단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때로는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우리의 등에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예수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등에 업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걸음을 보며, 아니 우리의 등에 타신 예수님을 보며 사람들은 “호산나,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신 자신의 모습을 그들의 눈에 깊이 새겨 두고 싶으셨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타는 작은 나귀 새끼는 바로 너희다”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조금 더 뒤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들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작은 나귀 새끼로서 제자들을 사용하시려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자신들이 작은 나귀 새끼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등에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등에 모시고, 또한 많은 짐을 지고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짐은 결코 무겁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그것을 짊어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영원한 구원과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