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年03月08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3月8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22編 3(2)~5(4)節
〇讃 頌 讃頌歌 23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4 (四旬節 [1] )
〇讃 頌 讃頌歌 457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0章 17~34節
〇説 教 「私たちが願うことは?
(우리가 원하는 것은?)」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6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3月 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私たちが願うことは?」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0章17~34節
イエスさま一行は、エルサレムに入る直前までやって来ました。いよいよ主の十字架が近づいてきています。そこで、イエスさまは改めてご自身が十字架にかかり死ぬこと、そして三日目に復活することを弟子たちに予告しています。これで三度目です。
しかし、まさにその時に、ヤコブとヨハネの母がイエスさまにひれ伏し願います。その願いは、イエスさまが王座に就いたときには、ヤコブとヨハネをナンバー2とナンバー3の座に就かせて欲しいというものでした。
その願いを聞いていた他の弟子たちが腹を立てていることから、弟子たちは皆同じような願いを持っていたのでしょう。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かかり死んでしまう、その話を聞いているのに、どうして、このような願いが出てくるのか。
ここには、いくらイエスさまの側にいても何ら変わらない、悔い改めることのない人間の罪が浮き彫りにされています。
しかし、私はこの母親の願いが、単に身勝手な欲望から出た願いではないような気がいたします。それは、どういうことかと言いますと、この母親は弟子たち以上にイエスさまの言葉を聞いて受け止め、「三日目に復活する」ことを信じてい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復活なされ、主の王座に就かれるのだ、と信じているから、このような願いが出てくるのです。
しかも、それは真剣な願いなのです。「ひれ伏し」(1節)とあります。ただごとではない強い姿勢です。不治の病の癒しや赦しを人々がひれ伏し求めましたが、それほどに強い願いなのです。ただ、問題だったのは、癒しの求めは重荷が取り去られる求めですが、これは何かを得たいがための求めでした。今、以上の祝福を求めての「おっしゃってください」という願いでした。前に異邦人の百人隊長が「ただ、ひと言おっしゃってください」(8:8)と願った時、イエスさまは「イスラエルの中でさえ、これほどの信仰を見たことがない」と言われました。でも、この親子の願いが、イエスさまが願っている弟子たちの成長とは大きく違っていたのです。
ヤコブとヨハネは、イエスさまの「このわたしが飲もうとしている杯を飲むことができるか」との問いに「できます」と答えました。いい加減な思いで答え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殉教する覚悟をもって答えたのです。実際、ヤコブは十二弟子最初の殉教者となっています。
しかし、ヤコブとヨハネが目指しているものとイエスさまが彼らに望んでいたものが大きく違っていたのです。弟子たちは殉教という、神さまに自分の命を献げるその行いによって認められると考えていました。弟子たちは自分が高められること、神の国において一番偉い者になることを目指していました。だから、イエスさまは偉くなりたければ、皆に仕える者、皆の僕になりなさいと教えられ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はこれまでに後にいる者が先になる、神さまの愛が支配する神の国がどのようなものか、教えて来られました。しかし、弟子たちは依然として理解す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ようです。十字架の杯を飲むということは、弟子たちが考える殉教の苦しみを味わう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の徹底的な裁きを受けるということです。後にイエスさま御自身「この杯を、できることなら過ぎ去らせて下さい」(26:39)と父なる神さまに願うほどの杯なのです。しかも、イエスさまは罪もなく、裁かれる必要もないお方なのに、私たち人間の罪を赦すために、全ての罪を背負い、十字架刑によって裁かれる、それが十字架の杯です。
本来、こんな十字架の杯を飲むなんて、私たち人間に出来ることではないのです。それでもイエスさまが十字架の杯を飲むことが出来るかと問われ、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ついて来なさいと言われるのは、本来、人間がいくら努力したとしても到底出来ることではないことを気付かせるためなのです。十字架を負う苦しみを自分が人より上になる条件だと誤解しているのを知って欲しいから。また、十字架の愛の支配というものを、自分の事として、知って欲しいから、イエスさまは敢えて問われ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は誰でも、主なる神さまに背負われ、救われたいと願います。自分の重荷を負うのも嫌なのに、何で人の救いという重荷を負って、そのために自分を捨ててまでイエスさまについ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私たちにはよく分かりません。神さまは愛だから。それが答えだと頭では分かっていますけど、共感したくない、分かりたくない部分があります。それが私たちの限界なのです。それが私たちの根本的に持っています罪ということです。その罪のゆえに、私たちは苦しみます。
その私たちの苦しみを負うためにイエス・キリストは「人の子」となられました。そして、18節19節で繰返し「引き渡される」「引き渡す」と、十字架の救いの支配を強調されます。
全部自分で自主的に死んだというお偉い支配ではないないのです。「自分が先になる」というこの世の人間の支配とは違うのです。苦しくて逃げたいのに、でもあなたのためならと、自分が引き渡されてしまうのが、神さまの御支配から出た愛なのです。
イエスさまは「わたしが背負うから、あなたも罪に支配された自分を捨てて、わたしについて来なさい」と、神さまの愛の十字架の御支配の内に背負ってください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ついて行けるのです。
自分がやらなければとか、苦しくても自分がと、自分の思いに支配されている時は、十字架の愛をまだ誤解しており、神の国の愛の支配というものが分かっておりません。
そんな自分を捨て、ごめんなさいと素直に言えるようになるのが、私たちのためにご自分を捨てられる神さまの御支配、愛と憐れみの支配なのです。
自分のためにさえも嫌な杯なのに、隣人や家族の救いを求める神さまから出た憐れみに支配されるから、まるで自分が救いに引き渡されるようにして、「はい、できます」と主に従う道を歩むようにされるのです。そこに神の国があるのです。
その御国が来ますようにと「求め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る」(7:7)と、主が求められるのは、それが父なる神さまの御心だからです。そこに悪から救い出されてほしいと求められる、父なる神さまの御支配が来るからです。
ヤコブとヨハネが飲むことになるイエスさまの杯とは、十字架で流されたイエスさまの血を指しています。ヤコブとヨハネは、確かに杯を飲むのです。それで彼らは救われました。イエスさまの杯を飲むことは、戦いの勝利して、祝いの杯を分かち合う晴れがましさとは別の道を辿ることを意味します。それはつまり、イエスさまが歩んでおられる十字架への道を、弟子たちも同じように歩むことになる、ということを意味します。
私たちもそうです。イエスさまと共に人に仕える道を歩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が自分の十字架を負うと言うことです。あなたの十字架を私も一緒に負うから、共に歩んでいこうと、イエスさまは、今日も私たちを招いてくださっています。
【2026년 3월 8일 주일예배(요약판)】
“시우리가 원하는 것은 ?”
마태복음 20장 17~34절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실 것과,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십니다. 이것으로 세 번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리며 한 가지를 청합니다. 그 청원은, 예수님께서 왕좌에 앉게 되실 때 야고보와 요한을 둘째와 셋째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원을 듣고 있던 다른 제자들이 화를 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 역시 모두 같은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이런 소원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아무리 예수님 곁에 있다 하더라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회개하지 않는 인간의 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어머니의 소원이 단순히 자기중심적인 욕망에서 나온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어머니는 제자들보다도 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사흘째에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주의 왕좌에 오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런 소원이 나온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매우 진지한 소원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절하며”(20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결코 가벼운 태도가 아니라, 보통 일이 아닌 강한 자세입니다. 고칠 수 없는 병의 치유나 죄 사함을 구할 때 사람들이 엎드려 간구하곤 했는데, 바로 그만큼 강한 소원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병 고침을 구하는 것은 짐이 벗겨지기를 바라는 간구이지만, 이 소원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간구였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큰 축복을 바라며 “명하소서”라고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앞서 이방인 백부장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마 8:8)라고 간구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자의 소원은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제자들의 성장과는 크게 다른 방향에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순교할 각오로 한 대답이었습니다. 실제로 야고보는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이 바라보고 있던 것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셨던 것은 크게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순교라는 행위, 곧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바치는 그 행위를 통해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높아지는 것,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크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오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제자들이 생각하듯이 순교의 고통을 겪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친히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실 정도의 잔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며, 심판을 받으실 이유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 형벌을 통해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잔입니다.
본래 이런 십자가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우리가 십자가의 고통을 남보다 높아지기 위한 조건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의 다스림이 무엇인지, 그것을 자기 자신의 일로 알게 하시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 하나님께 짐을 지워 드리고,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자기 짐도 지기 싫어하면서, 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 짐을 지고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지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공감하고 싶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근본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죄입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18절과 19절에서는 “넘겨지리라”, “넘겨주리라”라는 표현을 반복하시며 십자가 구원의 다스림을 강조하십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여 장엄하게 죽는 위대한 통치가 아닙니다. “내가 먼저 된다”는 이 세상의 인간적인 지배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괴롭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래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하며 자신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짊어질 테니, 너도 죄에 사로잡힌 너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의 십자가의 다스림 안에서 우리를 짊어져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한다”, “힘들어도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아직 십자가의 사랑을 오해하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다스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을 내려놓고 “죄송합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통치, 곧 사랑과 자비의 통치입니다.
자신에게도 마시기 싫은 잔이지만, 이웃과 가족의 구원을 바라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자비에 사로잡히게 될 때, 마치 자신이 구원에 넘겨지는 것처럼 “예,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주님께 순종하는 길을 걷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며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악에서 건져내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마시게 될 예수님의 잔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가리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실제로 그 잔을 마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기쁨의 잔을 나누는 영광스러운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제자들도 함께 걸어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사람을 섬기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입니다.
“너의 십자가를 나도 함께 질 테니 함께 걸어가자.”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그렇게 초대하고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