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年03月01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3月1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18編 1, 4~5節
〇讃 頌 讃頌歌 21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5 (四旬節 [2] )
〇讃 頌 讃頌歌 144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0章 1~16節
〇説 教 「試される心 (시험받는 마음)」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47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3月 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試される心」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0章1~16節
先週は、広島牛田教会との合同礼拝でしたけれども、善い行いをしたら天の国に行けるのではなく、どこまでも天の父なる神さまの愛と恵みによるものだから、「善い方」すなわち神さまの恵みを求めるようにというメッセージを聞きました。
今日の聖書箇所は、具体的に天の国とはどういうものかを、イエスさまが「ぶどう園の労働者の譬え」を通して語られています。
この譬え話は、「ある家の主人」が朝早くぶどう園で働く働き手を探しに出かけるところから始まります。「一日一デナリオン」という契約は、公正な取り決めです。そして、この「一デナリオン」は、人が一日生きていくために必要なものでした。ぶどう園の主人は、9時ごろにも出かけ、「何もしないで広場に立っている人々」を見つけ、「あなたたちもぶどう園にいきなさい、ふさわしい賃金を払ってやろう」と言いました。12時ごろと午後3時ごろにも同じようにしました。そして最後、午後5時ごろにも行って、まだ立っている人たち、すなわち「誰も雇ってくれない人たち」がいたので、その人たちにも「あなたたちもぶどう園に行きなさい」と言いました。
ここで注目すべきは、「何もしないで立っていた」という描写です。これは単なる怠惰ではなく、労働の機会を得られずに取り残された存在たちであることを示しています。彼らは社会から必要とされていない、無視された人々と言えます。ぶどう園の主人はそのような人々を見つけ、労働へ、すなわち「生きる意味と尊厳のある場所」へと招き入れるのです。
そして夕方、賃金の支払いが始まります。この支払いの順序が、この譬え話の特質する点です。なぜなら、もし朝から働いた人が先に賃金をもらえば、彼らは初めから1日1デナリオンの約束でしたので、それをもらって満足して帰ったことでしょう。しかし、彼らは、たった1時間しか働かない人が1デナリオンもらったのを知ってしまいました。そこで自分たちはもっと多くもらえるのが当然だ、という期待を抱くことになりました。その期待が不公平であるという不満を抱くようになったのです。
「最後に来たこの連中は、一時間しか働きませんでした。まる一日、暑い中を辛抱して働いたわたしたちと、この連中とを同じ扱いにするとは」(12節)、この不満は、当然のように思います。
しかし、ぶどう園の主人は言います。「わたしはあなたに不正をしていない」「約束通り払った」と。そして、核心的な問いを投げかけます。「わたしの気前のよさをねたむのか。」(15節)
このたとえの最も深い神学的メッセージは、「神の国は報酬の公平さではなく、恵みの気前よさによって支配されている」という点です。人間の視点では、努力した分だけ報いが与えられる「功績主義」が常識です。しかし、神の国では、恵みは働きに応じて配分されるのではなく、神さまの自由と慈しみによって与えられるのです。
私たちはこの譬え話を聞いた時に、どうしても労働者を自分に置き換えて考えてしまいます。自分を午後5時に雇われた労働者と見るならば、このぶどう園の主人に対する感謝は大変大きなものになるでしょう。しかし、自分を朝早くからまる一日中働いた労働者と見るならば、どうしても納得出来ない話になってしまいます。
しかし、この譬え話は、ぶどう園の主人を中心に考えなくてはなりません。この主人は、1時間しか働かなかった人にも「同じように支払ってやりたい」というのです。主人は、最初からずっと自分のために働いたこの人々に何かを伝えるために、わざとこのようにしたのかもしれません。
実際、ペトロはイエスさまに向かってこのように言いました。「このとおり、わたしたちは何もかも捨ててあなたに従って参りました。では、わたしたちは何をいただけるのでしょうか。」(19:27)
イエスさまは、ペトロのように「自分はこんなに苦労して働いてきた」と思っている人に向けてこの譬え話を語ったのです。
そもそも、この譬え話は、一所懸命働いたその労働(信仰的な行い)を問題としていないのです。ただ、「わたしはこの最後の者にも、あなたと同じように支払ってやりたいのだ」という主人の心を分かってほしい、と私たちに語りかけているのです。
そして、7節の「だれも雇ってくれないのです」と叫ぶ人の声を聞くようにと、私たちを促しているのです。
「だれも雇ってくれない。」この叫びは、今日の食事にありつけない。明日、もう暮らしていけないという生活の苦労を嘆いているだけでなく、自分が誰からも必要とされていない現実に立ち尽くしている人々の叫びなのです。
主なる神さまは、そのような声にならない叫びをあげながら立ち尽くしている人々を捜し求め、ぶどう園の働き人として招いておられるのです。そうです。ぶどう園の働き人として招かれること自体が救いなのです。神さまの神のまなざしは、「どれだけ働いたか」ではなく、「その人が呼ばれたこと自体」を喜びとして捉えておられるのです。
もし、皆さんが、どうしてもぶどう園で朝6時から働いた人たちと同調して、これまで教会に仕えて努力してきた自分、信仰に生きてきた自分、ずっと教会に仕えてきた自分、そんな自分の「当然の報酬」が、後から加わった者と同じであることに、不満を感じてしまうのは、それは私たちがどれほど「自分の正しさ」に依存して生きているかを表しているのです。
けれども、この譬え話の本質は、私たちがどう評価されるかではなく、神さまがどのように与えてくださるかにあります。神さまは、自らのものを自らの自由で分け与える主です。そして、その気前のよさは、私たちが「より多くもらえなかったこと」を嘆くのではなく、「もらえるはずのなかった者にも等しく与えられたこと」を喜ぶためのものです。
あなたは、どの時間に招かれたでしょうか?。朝の6時かもしれません。夕方の5時かもしれません。けれども、誰であれ、ぶどう園に招かれたこと、それ自体が、すでに恵みの極みなのです。
私たちはこの譬え話を、自分の「損得」の観点で読むのではなく、神さまの喜びと慈しみのまなざしに立って読むべきです。なぜなら、そこに立って初めて「他者の祝福を喜べる心」が生まれ、妬みではなく感謝が生まれ、序列ではなく兄弟姉妹としての一致が育まれていくからです。
神の国では、皆が最後の者です。だからこそ、皆が先となる可能性を与えられています。このぶどう園、天の国は、等しく働き、等しく喜び、等しく恵まれる場所なのです。
【2026년 3월 1일 주일예배(요약판)】
“시험받는 마음”
마태복음 20장 1~16절
지난주에는 히로시마 우시다교회와의 합동예배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선한 일을 했기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하신 분’, 곧 하나님 자신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이 비유는 “어떤 집 주인”이 이른 아침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구하러 나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하루 한 데나리온”이라는 약속은 정당한 계약이었습니다. 이 한 데나리온은 사람이 하루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품삯이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아홉 시쯤에도 나가서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고 말합니다.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에도 그렇게 하였고, 마지막으로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아직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곧 “아무도 우리를 품꾼으로 쓰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도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놀고 서 있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해 사회에서 밀려난 존재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필요로 여김을 받지 못하고, 외면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그런 이들을 찾아내어 노동의 자리, 곧 ‘살아갈 의미와 존엄이 있는 자리’로 초대합니다.
저녁이 되어 품삯을 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급 순서가 이 비유의 핵심을 드러냅니다. 만일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이 먼저 품삯을 받았다면, 그들은 처음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받고 만족하여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이 먼저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자신들은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되었고, 그 기대는 곧 불공평하다는 불만으로 바뀌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2절)라는 말은 인간적으로 보면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말합니다.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약속대로 주었을 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5절)
이 비유의 가장 깊은 신학적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상의 공평함이 아니라, 은혜의 후하심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시각에서는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공로주의가 상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은혜가 행위의 양에 따라 분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유와 자비하심에 따라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들을 때 자연스럽게 자신을 품꾼에 대입합니다. 자신을 오후 다섯 시에 부름받은 사람으로 여긴다면, 이 주인에 대한 감사는 클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새벽 여섯 시부터 하루 종일 일한 사람으로 여긴다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품꾼이 아니라 포도원 주인을 중심으로 읽어야 합니다. 주인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너와 같이 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을 위해 충성스럽게 일해 온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자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마음, 곧 ‘나는 이렇게 수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향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는 열심히 일한 노동, 곧 신앙적인 행위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이 나중 온 자에게도 너와 같이 주고자 한다”는 주인의 마음을 이해해 달라고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그리고 7절의 “아무도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는 절규를 들으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써 주지 않았습니다.” 이 외침은 단지 오늘 먹을 양식이 없다는 생활의 어려움만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도 필요로 여김을 받지 못하는 현실 앞에 서 있는 이들의 절규입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 없는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런 이들을 찾으셔서 포도원의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그렇습니다. 포도원의 일꾼으로 초대받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일했는가’가 아니라 ‘부름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기쁨으로 여기십니다.
만일 우리가 새벽 여섯 시부터 일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지금까지 교회를 섬기고 신앙 안에서 살아온 자신의 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을 기대하다가 나중 온 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에 불만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자신의 의’에 의지해 살아왔는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본질은 우리가 어떻게 평가받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시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을 자신의 자유로 나누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후하심은 우리가 “더 많이 받지 못했다”고 탄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던 자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뻐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시간에 부름받았습니까? 아침 여섯 시일 수도 있고, 오후 다섯 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포도원에 초대받았다는 사실, 그것 자체가 이미 은혜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자신의 손익 계산으로 읽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자비의 시선 위에 서서 읽어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다른 이의 복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 생기고, 시기 대신 감사가 자리 잡으며, 서열이 아니라 형제자매로서의 일치가 자라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두가 나중 된 자입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먼저 될 가능성을 허락받은 자들입니다. 이 포도원, 곧 천국은 함께 일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은혜를 누리는 곳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