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年02月15日 主日礼拝式順・説教
2026年2月15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이사야) 53章 10節
〇讃 頌 讃頌歌 20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 (詩編 19編 )
〇讃 頌 讃頌歌 321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19章 1~15節
〇説 教 「限神の召しはどこに?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디에 있는가?)」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13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2月 1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召しはどこに?」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9章 1~15節
1節に「イエスはこれらの言葉を語り終えると、ガリラヤを去り、ヨルダン川の向こう側のユダヤ地方に行かれた」とあります。ヨルダン川を渡ることは、旧約聖書のヨシュア記にある「約束の地への進入」を象徴しており、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よる救いの完成を目指し、敵対勢力の待つエルサレムへと進む決意の表れでもあります。ここでのイエスの戦いは、武力ではなく、サタンや人間の罪との「霊的な戦い」でした。その戦いに備えるために、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に様々なことを教える必要があります。その最初の教えが、「離縁について」と「子供を祝福する」と言うことでした。
それにしても、霊的な戦いの最初の教えが「離縁(離婚)について」というのは、何だか相応しくないように思います。しかし、この教えは、単に離婚についての解釈を教え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
これは、当時のユダヤ人が常識として考えていた律法理解に挑戦するものでした。彼らの律法理解は、ファリサイ派を始めとするユダヤ社会を支配する者たちによって作り上げられてきた伝統であり、慣習、常識というものです。イエスさまはそれに真っ向から反対し、変革をもたらそうとし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の敵対勢力である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現れ、イエスさまを試みるために次のような質問をしました。「何か理由があれば、夫が妻を離縁することは、律法に適っているでしょうか。」(3節)
これは申命記24章1~4節にあるモーセの律法の解釈について質問をしているのですが、もし、離婚を否定するようなことを言えば、ヘロデ王とヘロデヤの再婚を批難したバプテストのヨハネと同じように牢屋に入れることも出来ますし、離婚に賛成するようなことを言えば、何かの「理由」とは何かと、また質問して、新たな解釈を示せば、それを律法違反の口実にして、訴えることが出来ます。
ここで問題となっているのが、申命記24章1~4節にある律法規定です。しかし、このモーセの規定は、積極的に離婚を許してはおりません。この規定は「妻に何か恥ずべきことを見いだし、気に入らなくなったときは」(申命記24章1節)という条件付きであり、この規定の中心は離縁状を書いて手渡したら、二度と戻らせてはならないし、戻ってはいけないというところです。つまり、一度、離縁状を書いて渡したら、二度と元のさやに納ま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もっと慎重になり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
そして、何よりも当時の社会では、女性は夫の「所有物」と見なされ、男性の都合で離縁される弱い立場にありました。この律法は、女性が夫から無闇に離縁され、路頭に迷わないようにするための規定でもありました。しかし、ファリサイ派を始めとするユダヤ社会を支配する者たちの「自分勝手な律法解釈」によって、この律法の意義がねじ曲げられていました。
そこで、イエスさまは申命記の例外規定(離縁の許容)を論じる前に、創世記に記された「創造の原点」を提示しました。神さまが人を男と女に造り、二人が一体となるよう定められた以上、人間がそれを引き離すことは本来あり得ないという結婚の本質を説いたのです。
モーセが離婚を認めたのは、心の頑なさ(人間の罪)による混乱を最小限に抑え、弱い立場の女性を守るための救済措置(許し)に過ぎず、神さまの本来の目的ではなかったと指摘しています。
このイエスさまの言葉を聞いて反論したのが、ファリサイ派の人々ではなく、なんと弟子たちだったというところがおもしろいと言いますか、当時の社会事情をよく表しています。弟子たちは「妻を迎えない方がましです」(10節)と言っていますが、これは当時の結婚事情があったようです。当時の結婚は、親たちが決めていたので、相手のこともよく分からずに結婚しました。当然、当たり外れがあったでしょうから、外れを引かされてしまったらたまりません。それで、外れたら、またくじを引けば良いという、そういう願望が込められているのです。これは女性たちから見たら、それこそたまったものではありません。「いいかげんにしなさい。あなたこそ外れだ」と思っていたことでしょう。
イエスさまは、独身についても11~12節で触れており、独身には三種類あると言われます。「結婚できないように生まれついた者」「人から結婚できないようにされた者」「天の国のために結婚しない者」。これらは自分で選び取ると言うよりも、神さまの「許し」「恵み」によるものだ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この独身も「許し」の範疇で言われていることがわかります。しかし、離縁のように、人類に罪が入ったところから来る「許し」ではなくて、12節にあるように、神の国のための献身を認めての「許し」なのです。
ですから、結婚を通して神さまに仕えることが召しであるならば、神さまはその恵みを与えてください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神さまが合わせてくださる結婚だけを求めればよいということですし、結婚している方は、結婚が何を意味するものなのかをもう一度受け止め、謙虚に相手に仕えていく必要があるかと思います。
また、独身が神さまの召しであるならば、それも神さまの恵みとして受け止め、独身を通して神さまに仕えれば良いのです。それを神さまは祝福してくださるのです。
その時、人々が神さまの祝福のために祈ってもらおうと子どもたちを連れてきました。もしかしたら、弟子たちはもっと離婚について聞きたかったのかも知れませ。弟子たちは自分たちの興味が削がれたのを起こって、「邪魔だ」と子供を遠ざけようとしました。これも当時の常識からすればおかしくはない話です。なぜなら、子どもは取るに足らない存在であり、神さまの祝福からは遠いとされていたからです。
しかし、イエスさまはこれを叱り、「天の国(神の国)はこのような者たちのものである」と宣言し、子供たちを祝福されました。
これは、神の国の実現のためには、女性や子どもたち、当時の社会的弱者が軽んじられてはいけないと教えておられるのです。
皆さん、イエスさまの教えの根底にあるのは、常に「すべてを神の国のために」という視点です。
私たちは、結婚にしろ、人間関係にしろ、自分の都合で解釈するのではなく、神さまが定めた本来の尊厳を互いに認め合い、謙虚に仕え合うことをまず考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そして、この世の常識や身勝手な考えで人を排除せず、すべての人が神さまに招かれていることを忘れずに、社会的弱者への視線を常に持つ必要があります。
私たちは、世俗の常識や身勝手な判断に縛られず、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それぞれの「召し」に従い、神の国の実現のために歩むことが求められているのです。
【2026년 2월 15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디에 있는다?”
마태복음 19장 1~15절
1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구약성경 여호수아에 나오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감”을 상징하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완성을 향해, 적대 세력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려는 결단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싸움은 무력이 아니라 사탄과 인간의 죄를 향한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그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가르침이 바로 “이혼에 대하여”와 “어린아이를 축복하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싸움의 첫 가르침이 “이혼에 대하여”라는 것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단순히 이혼에 대한 해석을 전하고자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상식으로 여기고 있던 율법 이해에 도전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의 율법 이해는 바리새파를 비롯하여 유대 사회를 지배하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전통과 관습, 그리고 상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 변화를 가져오려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적대 세력인 바리새인들이 나타나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절)
이 질문은 신명기 24장 1~4절에 있는 모세 율법의 해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이혼을 부정하신다면 헤롯 왕과 헤로디아의 재혼을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할 수 있었고, 반대로 이혼을 인정하신다면 “어떤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따져 물어 율법 위반의 구실로 고발할 수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명기 24장 1~4절의 규정입니다. 그러나 이 모세의 규정은 적극적으로 이혼을 허락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신 24:1)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으며, 핵심은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보낸 후에는 다시 돌아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즉 한 번 이혼하면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으니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은 남편의 소유물처럼 여겨졌고, 남성의 형편에 따라 버림받기 쉬운 약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 율법은 여성이 함부로 버림받아 길거리에 내몰리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규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를 비롯한 지배층의 자기중심적인 율법 해석 때문에 그 본래 의미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명기의 예외 규정을 논하시기 전에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의 원점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둘이 한 몸을 이루도록 정하셨으므로, 사람이 그것을 나누는 것은 본래 있을 수 없다는 결혼의 본질을 밝히신 것입니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마음의 완악함, 곧 인간의 죄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하고 약한 위치의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구제적 허용일 뿐,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아니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반응하여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 상황을 잘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10절)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결혼은 부모가 정해 주었기에 서로를 잘 알지 못한 채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고, 만족스럽지 못한 결혼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선택하고 싶다는 바람이 담겨 있었습니다.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을 것입니다. “적당히 하세요. 오히려 당신이 문제입니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어 11~12절에서 독신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결혼하지 못하게 된 사람, 사람에 의해 그렇게 된 사람, 그리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 이 세 부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선택이라기보다 하나님의 허락과 은혜에 속한 일입니다. 독신 역시 하나님의 허용 안에 있지만, 이혼처럼 죄로 인해 주어진 허용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을 인정하시는 허용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부르심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는 결혼만을 구하면 되며, 이미 결혼한 사람은 결혼의 의미를 다시 받아들이고 겸손히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또한 독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독신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때 사람들이 축복 기도를 받게 하려고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이혼 문제를 더 듣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관심이 끊기자 화가 나서 아이들을 물리치려 했습니다. 당시 상식으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아이는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고 하나님의 축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꾸짖으시며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라고 선언하시고 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여성과 어린이, 곧 사회적 약자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가르침의 근저에는 언제나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라는 시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이든 인간관계든 자신의 편의대로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본래의 존엄을 서로 인정하며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상식과 이기적인 생각으로 사람을 배제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부름받았음을 기억하며 사회적 약자를 향한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세속적 기준이나 자기중심적 판단에 매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