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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年02月08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2月8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箴言(잠언) 3章 11~12節
〇讃    頌    讃頌歌 1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0 (詩編 16編 )
〇讃    頌    讃頌歌 524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18章 15~35節
〇説   教    「限りない赦し(한없는 용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78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2月 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限りない赦し」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8章 15~35節


 今日の聖書箇所は、迷い出た羊の譬えに続いて語られていますが、罪を犯したその人も「小さな者」であり、滅びてはならない「一匹の羊」なのです。
 まず、イエスさまは「兄弟があなたに対して罪を犯したなら、行って二人だけのところで忠告しなさい。言うことを聞き入れたら、兄弟を得たことになる」(15節)と言われます。これは、教会の中で起こる躓きの一例であり、その時、どのように対処すべきか、その対処方法を順序立てて命じています。


 この兄弟とは、血縁の関係ではなく、教会における信仰の仲間という意味です。その仲間の一人が罪を犯し、人に躓きを与えました。しかし、神さまは罪を犯したその兄弟姉妹のことをも心に留めておられて、羊飼いは失われた羊を探しに出てゆかれるのだ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まず私たちにとって大切なことは、私たちの罪を赦すために十字架におかかりになった主の犠牲と、そこに現された神さまの大きな憐れみを思い起こすことです。罪を犯した兄弟姉妹たちに怒りを燃やして断罪する前に、悔い改めを導いて兄弟姉妹を失わないで済むように神さまに求めることをイエスさまは命じておられます。


 そして、その最初に為すべきことは、「行って二人だけのところで忠告しなさい」(15節)ということです。この「忠告する」というのは、「責めること」もしくは「もしくは「罪を明らかにすること」です。それは自分の怒りを相手にぶつけるのが目的ではなく、どこまでも「兄弟を得る」ためなのです。もし、それで「相手が言うことを聞き入れたら、兄弟を得たことになる」(15節)。すなわち、その人との信頼関係を回復したことになります。


 もし聞き入れなければ、次の段階の対処です。「ほかに一人か二人、一緒に連れて行き」(16節)、一緒に忠告します。この場合、忠告する側の人数が多いですから、責めるような言葉にならないように配慮することが必要となります。
 そうやっても聞き入れないならば、「教会に申し出なさい」(17節)と第3段階に移ります。


 このように教会というところは、人の罪を断罪するところではなく、罪からその人を解き放つことに重きを置いているのです。何としても悔い改めに導きたいのです。教会の交わりにつなぎ留めたいのです。それは、「これらの小さな者が一人でも滅びることは、あなたがたの天の父の御心ではない」とイエスさまが言われているからです。


 ただ、ここで私たちが勘違いしてはいけないことは、罪に対し責めるのではなく許すことが優先であると考えてはいけません。聖書が私たちに教えているのは、罪に対して徹底的な裁き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罪により人は神さまに裁かれ滅んでしまうのです。そうならないために、先ほどの方法で、罪を犯した者を神さまの前に悔い改める者として連れ戻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ただ、それでも最終手段である「教会の言うこと」も聞き入れないなら、「その人を異邦人か徴税人と同様に見なしなさい」(17節)と言われています。この場合の「異邦人か徴税人」というのは、ユダヤ人たちに共通理解としてあった神さまに断罪される罪人という意味です。しかし、この異邦人も徴税人も神さまの愛と赦しの中にあります。彼らも神さまに悔い改め赦しを願うのであれば、「失った羊」を見つけ喜ぶ羊飼いのように、神さまは喜ばれるのです。


 ただ、実際、人の罪を責める(指摘する)というのは、難しい問題です。私たちはすぐに感情論になってしまいます。特にイエスさまがここで言われているのが、「兄弟があなたに対して」と言われているように、自分が傷つけられている時です。冷静に対処しなさいと言われてもそうはいきません。冷静に罪を指摘したとしても、「おまえにそんなことは言われたくない」と撥ね付けられてしまいそうです。
 そのため、今の日本社会は、他人にはあまり干渉しないという態度を保っているところがあります。皆が後ろめたい思いを抱えながら、互いに互いを赦し合っているところがあります。そのため、余計に罪の指摘というのは難しいものがあります。


 しかし、教会というところは、神さまの御言葉によって自分の罪が明白にされ、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罪赦された者たちが神さまの愛の中で集められたものですから、そうした罪のぬるま湯につかっている状態から、もっと積極的な愛と赦しとの関係が与えられるはずです。ですから、互いの罪を指摘し合うというのは、キリストの愛が実を結んだしるしであって、教会の成長には必要なことであるのです。


 「どんな願い事であれ、あなたがたのうち二人が地上で心を一つにして求めるなら、わたしの天の父はそれをかなえてくださる。二人または三人がわたしの名によって集まるところには、わたしもその中にいる。」(19-20節)
 私たちはこのイエスさまの御言葉を忘れてはいけません。私たちの交わりには、そこに主イエス・キリストがいかなる時もおられるのです。主の御前にいつも謙遜に仕えていこうとする姿勢が、教会における交わりに必要であり、私たちが心を合わせ祈ち続けるならば、神さまはそれを叶えてくださるのです。


 ところで、このイエスさまの話を聞いたペトロが「主よ、兄弟がわたしに対して罪を犯したなら、何回赦すべきでしょうか。七回までですか」(21節)と質問します。ここでもイエスさまの言葉の真意をくみ取れず、愚かな質問をしております。
 ペトロは「何回」とか「七回まで」とか、赦す回数に拘っています。この回数に拘っているのは、ペトロがこの「赦す」ということを何回まで我慢すれば良いのかと考えているからです。ペトロはこの罪の赦しに関して、自分がどれほど忍耐し、自己犠牲を払えば良いのかと考えていたのです。


 そんなペトロにイエスさまは、「七回どころか七の七十倍までも赦しなさい。」(22節)と答えられました。「七の七十倍」、限りなく赦せということです。そんなこと私たちにできるでしょうか。私たちにできることではないのです。そこで、イエスさまは「仲間を赦さない家来の譬え話」をされました。


 この譬えは、もう説明する必要もないでしょう。返済す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な借金を、すなわち私たちの罪を主君である神さまは、ないものと見做してくださ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単に自己犠牲ということで済む話ではありません。ただただ、ここには神さまの強い愛が示されています。神さまはあなたを愛し、どんなに私たちが罪深くても、また何があっても、あなたに関わり続けようとされる強い意志が示され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にはこの神さまの愛の深さは分か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でも、少なくても、私たち人間関係のもろさ、悲しみならすぐに想像ができます。
 それならば、私たちは神さまに愛され、赦されない罪を赦された者として、人に関わり、絆を深めるよう努力することは当然のことでしょう。


 皆さん、今日の御言葉をどのように受け止めたでしょうか? また、あなたは今どのような人間関係に悩み、もがいているでしょうか? 赦せない相手の顔が思い浮かぶでしょうか? そして、そのような毎日の中で、あなたはどこに神さまの愛を感じますでしょうか?


 神さまの愛は、私たち人間の複雑で壊れやすい関係を超えて、真っすぐに私たちに注がれております。ですから、心の中の悩みや葛藤を神さまの前に差し出しましょう。そして神さまが決して見捨てないことを思い出しましょう。


【2026년 2월 8일 주일예배(요약판)】

      “한없는 용서”
                       마태복음 18장 15~35절


  오늘의 성경 본문은 길 잃은 양의 비유에 이어서 말씀되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그 사람 또한 ‘작은 자’이며, 멸망해서는 안 되는 ‘한 마리의 양’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1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실족하기 쉬운 한 예이며, 그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단계적으로 명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란 혈연관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믿음의 동료를 의미합니다. 그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죄를 범하여 다른 이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한 그 형제자매들까지도 마음에 두고 계시며,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아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희생과,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죄를 범한 형제자매를 향해 분노하며 정죄하기 이전에, 회개로 이끌어 그들을 잃지 않도록 하나님께 구하라고 예수님은 명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15절)는 것입니다. 여기서 ‘권고한다’는 것은 ‘책망한다’, 곧 ‘죄를 밝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는 데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형제를 얻기 위함’입니다. 만일 그가 말을 듣고 받아들인다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15절), 곧 그와의 신뢰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만일 듣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16절) 함께 권고합니다. 이 경우 권고하는 쪽의 인원이 많아지므로 정죄하는 말투가 되지 않도록 더욱 세심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라”(17절)고 하시며 세 번째 단계로 나아갑니다.


  이처럼 교회는 사람의 죄를 정죄하는 곳이 아니라, 죄에서 그 사람을 풀어주는 데에 무게를 두는 공동체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회개로 이끌고, 교회의 교제 안에 붙들어 두고자 합니다. 이는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죄를 책망하기보다 용서가 우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죄에 대해 철저한 심판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죄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앞서 말한 방법으로 죄를 범한 자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자리로 돌이켜 세워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단계인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7절)고 하십니다. 여기서 ‘이방인과 세리’란 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이해하던, 하나님께 정죄받은 죄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안에 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는 목자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쉽게 감정적으로 변합니다. 특히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고 상처를 입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냉정하게 대처하라고 해도 쉽지 않으며, 설령 차분히 죄를 지적해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말하느냐’는 거부를 당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일본 사회는 타인에게 깊이 간섭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로가 뒤로는 부담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서로를 그냥 넘어가 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죄의 지적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죄가 드러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은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무감각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인 사랑과 용서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서로의 죄를 지적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맺은 열매이며, 교회의 성장에 필요한 일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9-20절).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교제 가운데에는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늘 겸손히 섬기려는 자세가 교회의 교제에 필요하며, 우리가 마음을 모아 계속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절)라고 묻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님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 베드로는 ‘몇 번’, ‘일곱 번까지’와 같이 용서의 횟수에 집착합니다. 이는 용서를 얼마나 참아야 하는지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이 얼마나 인내하고 희생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2절)라고 대답하십니다. 곧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 곧 우리의 죄를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없는 것처럼 여겨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자기희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며, 오직 하나님의 강한 사랑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깊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관계의 연약함과 슬픔은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사랑받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까지 용서받은 우리는 마땅히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유대를 깊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또한 지금 여러분은 어떤 인간관계에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계십니까? 용서할 수 없는 상대의 얼굴이 떠오르십니까? 그리고 그런 일상 속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디에서 느끼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복잡하고 연약한 관계를 넘어 곧바로 우리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속의 고민과 갈등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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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6年02月08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