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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12月14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12月14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ミカ書(미가) 5章 1(2)節
〇讃    頌    讃頌歌 34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17 (待降節 [3] )
〇讃    頌    讃頌歌 104
〇聖書奉読    ルカによる福音書 (누가복음)
         2章 1~7節
〇説   教    「救い主の生まれるところ
          (나구세주가 태어나실 곳)」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114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12月 1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救い主の生まれるところ」
              ルカによる福音書 2章 1~7節


 今日の聖書箇所は、イエスさまのお生まれになった時の時代背景から始まっています。時は、「キリニウスがシリア州の総督であったときに行われた最初の住民登録」(2節)が行われた時です。これから分かることは、キリニウスは軍人でありますので、厳しい軍政がしかれる中、さらに税と懲役を強いるために住民登録が行わ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住民登録は、ローマ帝国が徴税と徴兵のために行ったことでした。ヨセフとマリアにとって何の益にもならないことです。この圧力からヨセフは逃れることが出来ず、身重のマリアを連れて、ガリラヤの町ナザレからユダヤのベツレヘムへと旅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
 その距離は約140㎞です。マリアは身ごもっていましたから、母子ともに守られるように、気をつけながら、旅でありましたから、3~4日は少なくともかかったでしょう。大変な旅です。


 それにしても、ヨセフはマリアを連れて行く必要があったのでしょうか。家長が一人出向いて家族の分をまとめて登録すればいいのではないかとも思います。実際、そういうことが行われておりました。ですから、マリアを実家や親戚のところに預けるとか、夫ヨセフの母親にめんどうをみてもらって、ヨセフの帰りを待つとか、できたはずです。
 しかし、ヨセフはそうしませんでした。ヨセフがそうしなかったのは、結婚前に妊娠してしまったという事実があるので、肩身が狭いし、スキャンダルになるのを避けたかったということがあ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ヨセフにすれば、自分がマリア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思いも強かったかもしれません。いえ、マリアが私も一緒に連れて行ってとせがんだのかもしれません。この当たりの事情はよく分かりませんが、ここで、はっきり言えることが二つあります。


 一つは、これでベツレヘムからメシアが出現するというメシア預言が成就したということです。ミカ書5章1節にこうあります。「エフラタのベツレヘムよ/お前はユダの氏族の中でいと小さき者。/お前の中から、わたしのために/イスラエルを治める者が出る。/彼の出生は古く、永遠の昔にさかのぼる。」
 ユダヤ人はこの有名なメシア預言を知っていましたが、まさかベツレヘムに旅に来た地方の者がそこでメシアを出産することになるとは思わなかったでしょう。神さまの奇しき御業です。そして、もう一つ言えることは、ベツレヘムでの出産によって、ヨセフとマリアがナザレの町で非難の的にならずに済んだということです。婚約期間の出産は非難の的になるのは目に見えています。処女が御使いのお告げで出産したなどと説明しても、容易に信じてもらえ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すべてに、神さまの計らいがあったのです。


 6~7節をご覧下さい。「ところが、彼らがベツレヘムにいるうちに、マリアは月が満ちて、初めての子を産み、布にくるんで飼い葉桶に寝かせた。宿屋には彼らの泊まる場所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6-7節)
 「布にくるんで」とありますが、これは「産着を着せる」という意味です。別に、ぼろ切れにくるんだわけではありません。二人は、出産に備えて産着を用意しておいたのでしょう。しかし、ヨセフとマリアは、まさか生まれた子を飼い葉桶に寝かせるとは考えもしなかったでしょう。そう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理由が「宿屋には彼らの泊まる場所がなかったからである」とあります。
 よくクリスマス・ページェント(降誕劇)では、夫のヨセフが、宿屋を一軒一軒訪ね回りながら。「泊まらせていただけませんか。身重の妻がいるのです」と頼んでも、宿屋の主人は「あいにく、うちは満室です。どこか別の宿屋にあたってみてください」と答え、行く当てのない二人が、最後、飼い葉桶のある家畜小屋で出産するというのが定番になっています。
 二人は宿屋が満員であったから締めだされ、家畜小屋に追い払われてしまった、と理解されていますけど、本当にそうだったのかと思うのです。なぜなら、ヨセフはベツレヘムが故郷です。親戚もいたでしょうし、ユダヤの文化からして旅人をもてなさないはずがありません。部屋がなかったとしても互いに助け合い、一緒の部屋にでも「お泊まりなさい」となるはずです。ましてや出産間近の女性を連れ立っております。放っておくはずがありません。もし陣痛が起これば、皆で助けの手を差し伸べて、出産の手助けをするのが普通です。それなのに、なぜ、イエスさまはこのような生まれ方をしてしまったのか、不思議でなりません。


 聖書には「宿屋には彼らの泊まる場所がなかった」とあり、この「場所がなかった」という言葉から部屋がなかったと考えられてきました。でも、「泊まれなかった」とは記されていません。部屋がなかったわけではなく、「場所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ヨセフとマリアが居ても良い場所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しょう。
 「宿屋」と訳されている言葉は、「良きサマリア人のたとえ」で出てきます「宿屋(パンドケイオン)」、これはいわゆる旅館のことを意味しますが、この「宿屋」とは違って、7節の「宿屋(カタルマ)」は簡易宿泊所みたい施設のことを意味します。人と荷物が一杯ある中で、皆がざこ寝するような場所のことです。恐らく、ヨセフとマリアはこの宿に宿泊していたのでしょう。ところが、その時にマリアに陣痛が起こってしまいました。そこでは出産することは出来ません。そこで、家畜小屋に移動して産んだと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


 ただ、ここで確かなことは、イエスさまがお生まれになる時に、イエスさまのこの世における両親には、「彼らの泊まる場所がなかった」すなわち、彼らには安心して居ても良い場所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自分のいる場所がない、居場所がない。そういう状況の中で、そういう環境の中で、私たちの救い主イエスさまはお生まれになったのです。
 これは、私たちに対する神さまの強いメッセージとして聞き取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あなたの中に救い主イエスさまの居場所はあるのかと、イエスさまをお迎えする場所はあるのかと、神さまは私たちに問うておられるのです。


 私たちの心の中に、イエスさまをお迎えする場所はあるはずです。でも、私たちの心は自分の生活のことばかりに夢中で、イエスさまを迎え入れることをないがしろにしています。結局、イエスさまが居ても良い場所が用意できないのです。それが「彼らの泊まる場所がなかった」という言葉が意味することだと思います。
 そしてまた、別の見方をすれば、この世界に自分のいる場所を見つけられず、暗闇の中を生きる人々に光りを与えるために、救い主イエスさまは居場所のない状況の中でお生まれになったと理解することも出来ます。
 どちらにせよ、救い主イエスさまは、自らを拒み、受け入れる余裕もない、暗闇を彷徨う人たちのために、お生まれ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このような状況の中でお生まれになり、飼い葉桶に寝かされた幼子は、やがて成長し、十字架の道を辿られます。この飼い葉桶と十字架は、その誕生から堅く結びついているのです。これが、私たちを罪から救うための神さまの御計画でありました。


 先々週、ヨハネによる福音書1章からクリスマスメッセージを聞きましたが、言なる神が暗闇を照らす光としてこの世に来られたという内容です。しかし、暗闇は、すなわちこの世は光を理解せず、受け入れませんでした。それが私たちが生けている世界です。しかし、それでも神さまはこの世を、私たち一人一人を愛するが故に、イエスさまをこの世界に送られました。そして、イエスさまは希望の光として十字架への道を歩まれ、自ら供え物のいけにえとしてささげられ、私たちに赦しと新たな命を与えて下さいました。


 皆さん、私たちは受け入れる受け入れないということとは関係なしに、「この飼い葉桶に寝かされた幼子」の中に、私たちすべての人のためにお生まれになった救い主を見いださすことが出来るかということにかかっているのです。
 皆さん、この事実を前に、私たち人間は自分の高慢さを打ち砕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して、羊飼いや東方の博士たちと共に、ひれ伏して礼拝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2025년 12월 14일 주일예배(요약판)】

     “구세주가 태어나실 곳” 
                              누가복음 2장 1~7절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소개하며 시작합니다. 때는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 시행된 첫 번째 호적 등록”(2절)이 이루어지던 시기입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구레뇨가 군인이었기 때문에 강한 군정 아래에서 세금과 징역을 위해 호적 등록이 강요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호적 등록은 로마 제국이 징세와 징병을 위해 시행한 것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압박 앞에서 요셉은 피할 길이 없었고, 임신한 마리아를 데리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베들레헴까지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거리는 약 140km입니다. 마리아는 몸이 무거운 상태였기에, 모자(母子)가 보호받도록 조심하며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런 여정을 감안하면 최소 3~4일은 걸렸을 것입니다. 참으로 고된 여행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왜 마리아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집안의 가장만 가서 가족들을 함께 등록하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그런 방식이 흔했습니다. 마리아를 친정이나 친족에게 맡기거나, 요셉의 어머니에게 부탁해 두고 요셉 혼자 다녀와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결혼 전에 임신하게 된 사실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고, 스캔들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요셉의 마음속에는 ‘내가 마리아를 지켜야 한다’는 간절한 책임감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마리아가 ‘저도 함께 가게 해 주세요’ 하고 간청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점입니다.
  미가서 5장 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가5:1)
  유대인들은 이 유명한 메시아 예언을 알고 있었지만, 지방에 살던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 등록 때문에 베들레헴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기묘한 섭리입니다.


2. 베들레헴에서 출산하게 됨으로써 마리아와 요셉이 나사렛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혼인 전에 출산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비난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처녀가 천사의 말씀대로 임신하고 출산했다”는 말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도하셔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6-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누였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여기서 “강보로 싸서”라는 말은 ‘산모가 준비한 아기 옷을 입혔다’는 의미입니다. 허름한 천조각이 아니라, 두 사람은 출산을 준비해 배내옷을 챙겨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태어난 아기를 구유에 눕히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는 여관에는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극(降誕劇)에서 보듯이, 요셉이 여관을 찾아다니며 “임신한 아내가 있으니 묵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지만, 여관 주인은 “빈방이 없습니다”라고 거절하고, 결국 두 사람이 외양간에서 출산하게 되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요? 요셉은 베들레햄이 고향이었습니다. 친족들이 있었을 것이며, 유대 문화는 낯선 여행자를 환대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방이 없더라도 서로 양보해 함께 지내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더군다나 출산이 임박한 여인을 외면할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진통이 시작되면, 모두가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렇게 태어나셔야만 했을까요?


  성경은 “여관에 그들이 있을 곳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묵을 방이 없었다’가 아니라, ‘그들이 머물러도 되는 자리’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관”은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 비유’에 나오는 여관(판도케이온)과는 다른 단어입니다. 누가복음 2장의 “여관(카탈루마)”은 짐과 사람들이 가득한 공용 숙소, 즉 간이 숙박공간을 의미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미 그곳에 머물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마리아가 진통을 시작했습니다. 공용 공간에서는 출산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가축을 두던 공간으로 이동하여 출산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이 땅에서 예수님의 부모에게는 “그들이 머물 곳이 없었다”, 즉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자리, “있어도 좋은 자리”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없는 상황, 머물 자리조차 마련되지 않은 그 환경 속에서 우리 구세주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너희 마음에는 예수님을 모실 자리가 있느냐?” “너희는 구세주를 받아들일 공간을 마련하고 있느냐?”


  우리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맞아들일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생활에만 몰두한 나머지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일을 등한시하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이 머무실 공간을 준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머물 곳이 없었다”는 말씀이 주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세상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 구세주께서 ‘있을 자리조차 없는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구세주 예수님은 자신을 거부하는 세상, 여유도 없고 마음의 자리도 내어주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장성하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구유와 십자가는 탄생의 순간부터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들었던 크리스마스 메시지는, ‘말씀이 어둠 속에 빛으로 오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빛을 깨닫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셨기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희망의 빛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셔서 우리에게 용서와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구유에 누인 아기” 가운데 모든 사람을 위해 오신 구세주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고,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처럼 겸손히 엎드려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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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12月14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