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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11月16日 主日礼拝 説教式順・

 

2025年11月16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Ⅱコリント(고린도후서) 3章 18節
〇讃    頌    讃頌歌 42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73 (イザヤ65章 )
〇讃    頌    讃頌歌 201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7章 1~13節
〇説   教    「あなたは変えられる
          (당신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54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11月 1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あなたは変えられる」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7章1~13節


 ペトロの「あなたはメシア、生ける神の子です」(16:16)という信仰告白の後、イエスさまはご自身が十字架の上で死ぬこと、そして、三日目に復活することを予告されました。しかし、ペトロをはじめとする弟子たちはイエスさまの言葉を真剣に受け止めることが出来ません。そんな弟子たちに、イエスさまは「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わたしに従いなさい」(16:24)と勧められました。まだ未熟な信仰である弟子たちに対し、自分なりの十字架を背負いながら、イエスさまと共に歩む中で、信仰が成熟していくことを願っておられます。


 弟子たちは、未熟な信仰ながらもイエスさまと共に歩もうと努力しておりました。するとイエスさまはペトロとヤコブとヤコブの兄弟ヨハネだけを連れて、高い山に登られました。高い山に登られたのは、ルカによる福音書によれば、祈るためでした(ルカ 9:28)。イエスさまはこれから十字架の死に向かって歩むことになります。それが神さまの御旨だとしても、それに従うには、勇気と決断が必要です。そのために、イエスさまはより神さまに近づくために高い山に登られ、祈られたのでしょう。そして、祈っていたらイエスさまのお姿が突然輝き始めたのです。2節です。「イエスの姿が彼らの目の前で変わり、顔は太陽に輝き、服は光のように白くなった。」


 「イエスの姿が彼らの目の前で変わり」、この「変わる」という言葉は、正確な訳に直すなら「変えられる」という言葉です。本来、イエスさまは神さまの栄光に覆われた存在の方です。しかし、この時のイエスさまは人間として神さまの前に立ち、神さまによって光輝く者に変えられたと言うことです。


 その場にいたペトロとヤコブとヨハネは喜んだに違いありません。弟子たちは自分が望むものとは違うイエスさまの歩みに戸惑っておりました。イエスさまは十字架の上で死ぬと予告されましたが、それは余りにもメシアとしての姿から遠く離れています。そして、自分たちもそれぞれの十字架を背負って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なんて、自分たちが望む道ではありません。弟子たちはまさに失望と憂鬱の中にあったのです。


 ところが、今、目の前にいるイエスさまはメシア本来の姿である光輝く姿をしております。着ている服も光のように白くなったと言います。それは直接目で見ることが出来ないほど輝い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しかも、そればかりではありません。そこにモーセとエリヤが現れて、イエスさまと語り合っている姿を見たのです。それこそ、弟子たちに与えられた、イエスさまが神の子であるしるしでした。揺らいでいた信仰が強められた瞬間でした。


 ペトロは思わず言いました。「主よ、わたしたちがここにいるのは、すばらしいことです。お望みでしたら、わたしがここに仮小屋を三つ建てましょう。」(17:4)
 ペトロはここでも勘違いをしております。イエスさまはこの時、祈っておられました。祈りの中でモーセとエリヤが現れたのです。モーセは律法を表します。エリヤは預言を表しています。それは旧約聖書の中に記された神さまの人間に対する救いの御業と御計画を表しているのです。モーセとエリヤと語り合うというのは、神さまの救いの御業、すなわち、十字架の死と復活を通して、人間の救いを全うしようとすることを確認しているわけです。そこにペトロは「口をはさんで」(17:4)、「わたしがここに仮小屋を三つ建てましょう」と言っているのです。


 ペトロの「仮小屋を建てる」という言葉は、このままここにとどまってください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の栄光の中に自分をいさせてくださいということでしょう。イエスさまはこれから山を下りて十字架の道を歩もうとされているのに、自分はこのままいさせてくださいということです。ペトロは「自分の十字架を背負う」ということをもう忘れてしまっています。


 その時、光り輝く雲が彼らを覆いました(17:5)。雲が覆うというのは、そこに神さまの御臨在が示されたのです。そして、「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適う者。これに聞け」という神さまの御声が聞こえました。これは「ペトロよ。口出しするな。思い違いをするな。主イエスの言葉をよく聞き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


 ペトロの中に、神さまの御計画である「苦しみを通しての栄光」という考えはありません。しかし、イエスさまの十字架は半年後に迫っておりました。ペトロをはじめ弟子たちは、イエスさまが苦難を通して栄光に入ることを知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す。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弟子たちは、自分たちの未来にも、安易な栄光を期待してはなりませんでした。イエスさまは、安易に栄光を求めていた弟子たちに対して、わたしとともに、わたしに従って苦しみを経てこそ栄光に入ることを伝えたかったのです。


 この高い山を下りれば苦難の十字架の道を歩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だからこそ、イエスさまはこの高い山で御自身の光輝くお姿を弟子たちに見せ、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日々イエスさまに従うことが決して空しいことで終わらないことを伝えたかったのです。高い山での栄光の御姿は、弟子たちの希望となる再臨のキリストの御姿でもありました。


 5節の「これに聞け」という言葉は、今の私たちにも語られている言葉です。私たちもまた、この時のペトロと同じように、神さまの言葉を聴くよりも、神さまの言葉を遮って、自分の思い、自分の考え、そういったものを優先させ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適う者。これに聞け」とは、まさに私たちに語られている言葉な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もう一度神さまの御言葉を聞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わたしに従いたい者は、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わたしに従いなさい。」(16:24)「起きなさい。恐れてはならない。」(17:7)


 私たちの信仰というのは、高い山の上のような非日常の神秘の世界に逃げ込むためにあるのではありません。信仰は、現実から逃避するためのものでもありません。そうではなくて、現実としっかりと向き合うことができるために、信仰は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現実のこの世界において、神さまを愛し、人を愛し、キリストに従って生きようとする時、初めて本当の意味で自分の罪深さも見えてきます。いかに愛に欠けているか、いかに自己本位であるか、いかに自分が醜いエゴイストであるかが分かります。その時に神さまの赦しを求める祈りも切実なものとなります。そして、もう一つ、自分は変えていただかなくてはならないことが、骨身に染みて分かるようになります。自分の醜さを知った人は、変えられたいと願います。


 その時、この山の上の出来事は、私たちにとって決定的に大きな意味を持つのです。キリストの姿が変えられました。その姿を指し示して神さまは私たちに言われるのです。あなたも変えられると。あなたも栄光に輝くキリストと同じ姿となるのだ、と。


 後にそのことを知らされた一人の人がいました。使徒パウロです。彼はコリントの信徒たちにこう書き送りました。「わたしたちは皆、顔の覆いを除かれて、鏡のように主の栄光を映し出しながら、栄光から栄光へと、主と同じ姿に造りかえられていきます。これは主の霊の働きによることです。」(Ⅱコリント3:18)
 「造りかえられる」という言葉は、先ほどイエスさまに用いられていた「変わる(変えられる)」という言葉と同じです。私たちもまた「変えられる」のです。主イエス・キリストと同じ姿に。この「主と同じ姿に」とは、ペトロたちが見た光輝く栄光の姿のことです。


 私たちも天の御国において光輝く姿に変えられるのです。そして、それは既に信仰生活において、聖霊の働きによって始まっているのです。だから私たちは絶望しません。絶望しないで現実と向き合うことができます。絶望しないで自分の罪深さとも向き合うことができます。時には、つまずき倒れるようなことがあったとしても、再び立ち上がって前に向かって歩いて行くことができるのです。主イエス・キリストが天の御国において完成する私たちの姿を既に見せ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2025년 11월 16일 주일예배(요약판)】

     “당신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13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고 신앙고백한 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고 권면하셨습니다. 아직 믿음이 미숙한 제자들이지만,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가운데 그들의 믿음이 성숙해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미숙한 믿음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걸으려고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야고보의 형제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그 산에 오르신 이유는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누가 9:28).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나아가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더라도, 그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높은 산에 올라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던 중 예수님의 모습이 갑자기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이 ‘변형되다’라는 표현은 원래의 뜻으로 보면 ‘변하게 되다’, 곧 ‘변화되다(변화시키다)’라는 의미입니다. 본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덧입혀진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때의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앞에 서 계셨고, 하나님에 의해 영광스럽게 빛나는 존재로 ‘변화되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던 메시아의 길과 전혀 다른 예수님의 걸음에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자신들이 상상하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자신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니, 그것은 제자들이 원하던 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실망과 우울함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계신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본래 모습, 곧 광채 나는 영광의 모습이었습니다. 입고 계신 옷도 빛처럼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눈으로 직접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그곳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확실한 표징이었으며, 흔들리고 있던 제자들의 믿음이 강하게 세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17:4).
  베드로는 이때도 여전히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간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 기도의 자리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엘리야는 예언을 상징합니다. 이는 곧 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과 계획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와의 대화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중간에 “끼어들어”(17:4) “여기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짓겠다는 말은, 곧 “예수님, 이곳에 계속 머물러 주십시오. 저도 이 영광 가운데 머물고 싶습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산을 내려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이미 잊고 있었습니다.


  그때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17:5). 구름이 덮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곧 “베드로야, 함부로 나서지 말라. 생각이 잘못되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거라”라는 의미였습니다.


  베드로 마음속에는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른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때는 불과 반년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가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에도 ‘쉽게 얻는 영광’ 따위는 없다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값싼 영광을 기대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걷고서야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이 높은 산을 내려가면 곧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 산 위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했습니다. 산 위에서 보여주신 그 영광은, 제자들의 희망이 될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5절의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때의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자기 생각, 자기 판단을 앞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그리고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17:7).


  우리의 믿음은 높은 산 위의 비일상적인 신비한 세계로 도피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은 현실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려 할 때 비로소 자신의 죄 깊음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사랑이 부족한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자신 안에 얼마나 많은 추한 이기심이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절실해지고, 또 하나, 내가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추함을 아는 사람은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그때 이 산 위에서의 사건은 우리에게 결정적이고도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변화될 수 있다. 너도 영광으로 빛나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이 될 것이다.”


  이 진리를 나중에 깨달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린도후서 3:18).


  여기서 “변화하여”라는 단어는, 앞서 예수님께 사용된 “변하다(변화되다)”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이. 여기서 “그와 같은 형상”이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본 영광스러운 빛나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하늘 나라에서 그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미 우리의 믿음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기에 현실을 마주할 수 있고, 절망하지 않기에 자신의 죄와도 마주설 수 있습니다. 때때로 넘어지고 쓰러질지라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나라에서 완성될 우리의 모습을 이미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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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11月16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