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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11月0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11月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요한복음) 15章 16~17節
〇讃    頌    讃頌歌 3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71 (イザヤ55章 )
〇讃    頌    讃頌歌 272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6章 13~28節
〇説   教    「自分の命を得るために
          (자신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6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11月 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自分の命を得るために」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6章 13~28節節


 弟子たちはこれまでに神さまの御業に何度も触れてきたわけですが、そこで、イエスさまは、改めて弟子たちに「人々は、人の子(私)を何者だと言っているか」と尋ねられました。弟子たちはすぐにそれぞれが「洗礼者ヨハネだ」「エリヤだ」「エレミヤだ」「預言者の一人だ」と言っていますと答えました(14節)。するとイエスさまは「それでは、あなたがはわたしを何者だと言うのか」(15節)と尋ねられました。


 イエスさまが、今、「あなたは何と言うのか」「人から何と言われようとも私のことを何者だと言うのか」と問うておられる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信仰において「主イエスと私」の繋がり、その関係を問われるのです。信仰において、主イエスと私の他、他人が入る余地はありません。


 弟子たちはためらいました。自分の信仰が今問われている。下手な答えは言えない。弟子たちは頭の中で答えを探しながら、仲間の弟子たちを見渡します。誰が答えるのか。すると、やはりここはシモン・ペトロが答えました。「あなたはメシア、生ける神の子です」(16節)と。これはかつて湖の上を歩いて来たイエスさまが沈みかけたペトロを助け上げた際に舟の中にいた人々が口にした言葉と同じです。


 すると、イエスさまはこのように応答されました。「シモン・バルヨナ、あなたは幸いだ。あなたにこのことを現したのは、人間ではなく、わたしの天の父なのだ。わたしは言っておく。あなたはペトロ。わたしはこの岩の上にわたしの教会を建てる。陰府の力もこれに対抗できない。わたしはあなたに天の国の鍵を授ける。あなたが地上で解くことは、天上でも解かれる。」(17-19節)


 イエスさまはここで、ペトロの本名である「シモン・バルヨナ」と呼びかけています。ペトロという名前は、イエスさまがシモンにつけたあだ名です。原語のギリシア語では、石を「ペトロス」、岩を「ペトラ」と言います。イエスさまはシモンの見た目や性格が、石のようにゴツゴツした、頑固な人物のように見えたのでペトロとあだ名を付けられたのかもしれません。ペトロという名前は、本来、神さまの愛を表すには相応しい名前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イエスさまはそのペトロに、「わたしはこの岩(ペトロ, ケファ)の上にわたしの教会を建てる」と言われたのです。


 それはつまり、ペトロのような頑固者で融通も利かず、なかなか信じない者を神さまは暖かく導き、信仰を表す者に変え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です。信仰というのは、本人の努力とか知識とか、力とか、そういったもので得るものではなく、神さまの愛と導きによって、ペトロのような者でも、信仰を表す者にし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しかも、「天の国の鍵を授ける」(19節)とまで言われます。


 しかし、人間の「信仰告白」というのは、まことに不確かなものであるのです。実際、この後、イエスさまが弟子たちにご自分が十字架の上で死ぬことと三日目に復活されることを予告された時に、ペトロは「主よ、とんでもないことです。そんなことがあってはなりません」(22節)と、イエスさまをいさめています。そんなペトロをイエスさまは「サタン、引き下がれ」と厳しく退けました。
 ペトロはイエスさまに対し、尊敬と愛情の表現のつもりで言ったのでしょうが、イエスさまのことを、イエスさまが何をなそうとしておられるのかを何も理解していなかったのです。確かに、ペトロは信仰告白を致しました。その信仰に対してイエスさまは「天の国の鍵を授ける」と祝福をなさいました。しかし、ペトロのこの時の信仰告白というのは、まだまだ未熟なもの、不確かなものであったのです。


 この後、ペトロはイエスさまが捉えられた時に、三度もイエスさまを「知らない」と否定し、呪いの言葉さえ口に致します。それは、イエスさまを信じた自分の人生を呪った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鶏が鳴いた時に、イエスさまの言葉を思い出し、泣きました。その時、初めてペトロは自分の罪深さを知り、深い悔い改めをするわけですが、それは神さまの裁きを恐れてのことでありました。それから、復活なさったイエスさまと出会い、神さまの愛の中で生きる者へと変えられていきます。


 ペトロの信仰というのは、深い挫折と己に対する絶望の上にあるのです。誰よりもイエスさまの近くにいたペトロでありますが、何もイエスさまのことを理解出来ずにいたのです。これは私たちにも当てはまります。ここにいらっしゃる方は、それなりの信仰というものを持っておられると思います。だから、この礼拝に集っているわけですが、私たちもペトロと同じように、イエスさまのことを少しも理解しておらず、自分の都合の良いように考えているところがないでしょうか。


 そんな私たちにイエスさまは「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と言われています。24節からです。「わたしについて来たい者は、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わたしに従いなさい。」(24節)
 イエスさまはご自身を指して「わたしの十字架を背負って」と言わずに、それぞれが自分の十字架を背負うように命じておられます。もしここでゴルゴタのあの十字架を示して「わたしの十字架を背負え」と言われていたら、とても大きすぎて誰一人として背負うことはできないでしょう。
 「十字架」というのは、ユダヤ人にとってそれは神さまから捨てられたことを意味します。イエスさまは人類の罪をすべて背負って十字架の上で、神さまに捨てられたのです。この十字架を私たちが背負わなくても良いように、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りました。ですから、イエスさまは「自分の十字架」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


 「自分の十字架」、それは人それぞれで、苦しみ方や感じ方はそれぞれに異なるものです。それは必ずしも捨てたものの大小によりません。ある人にとっては大した苦労でもないことが、別の人にとっては死ぬほどの苦痛を伴うこともあるでしょう。自分の十字架ですから、他の誰かと取り換えることができない、たった一つの生き方です。
 ペトロのことで言いましたら、この「自分の十字架」というのは、イエスさまのことを知らないとイエスさまを裏切ったこと、イエスさまを信じた自分の人生を呪ったことであったかも知れません。それでも、イエスさまの復活の命と愛に触れていくうちに、ペトロは確かなる信仰をもってイエスさまと共に歩む者へと変えられていったのです。


 「キリスト、神の子、インマヌエル(わたしたちと共にある方)」、最初の教会の信仰告白の言葉の背後には、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苦しみ、痛み、そして、そこに神さまの赦しと愛の出来事が張り付いているのです。だからこそ、この岩の上に教会は立ってい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も毎週の礼拝において、いえ、毎日の信仰生活において、信仰告白をしつつ、自分の十字架を背負って、歩んで行きたいと願います。


【2025년 11월 9일 주일예배(요약판)】
 
    “자신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마태복음 16장 13~28절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여러 번 체험해 왔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새삼스럽게 “사람들이 인자(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곧 각각이 “세례 요한이다”, “엘리야다”, “예레미야다”, “선지자 중의 하나다”라고 말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14절).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너는 누구라 하느냐”, “남들이 뭐라고 하든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에서 “주 예수와 나”의 연결고리, 그 관계를 따지십니다. 믿음에 있어서 주 예수님과 나 외에 다른 사람이 들어갈 여지는 없습니다.


 제자들은 망설였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시험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서투른 대답을 할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며 누가 대답할지 기다렸습니다. 그때 역시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16절)라고. 이는 일찍이 호수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께서 가라앉을 뻔했던 베드로를 구해 올렸을 때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했던 말과 같은 고백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 (17-19절).


 예수님은 여기서 베드로의 본명인 “바요나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님이 시몬에게 붙인 별명입니다. 원어 그리스어로는 돌을 “페트로스”, 바위를 “페트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생김새나 성격이 돌처럼 거칠고 완고한 인물처럼 보였기 때문에 베드로라고 별명을 붙였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본래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이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베드로)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베드로와 같은 완고하고 융통성도 없으며 믿음이 더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이끌어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킨다는 뜻입니다. 신앙이란 본인의 노력이라든가 지식이라든가 힘이라든가 그런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에 의해서 베드로 같은 사람조차도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겠다”(19절)고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신앙 고백”이란 실로 불안정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죽을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임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라고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베드로는 사랑과 존경의 마음에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지를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히 베드로는 신앙 고백을 했지만 그 고백은 아직 미숙하고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의 말마저 입에 올립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었던 자신의 인생 자체를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닭이 울 때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통곡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깊이 회개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참으로 사는 자로 변해갑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깊은 좌절과 자신에 대한 절망 위에 세워진 믿음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 가까이에 있던 베드로이지만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각자 나름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이 예배에 나와 있지만, 우리 또한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 편의대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절).
 예수님은 “내 십자가를 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만약 여기서 골고다의 저 십자가를 가리키며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한다면 그 십자가는 너무 커서 아무도 짊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란 유대인에게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아도 되도록,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 고통의 형태나 깊이도 각자 다릅니다. 누군가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다른 이에게는 죽을 만큼 힘든 일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이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와 바꿀 수 없는 단 하나의 삶의 방식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그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예수님을 세번 배신하고 저주했던 자신의 과거, 그 믿음을 저버렸던 기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과 사랑을 접하면서 베드로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로 변해갔습니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이것이 초대 교회의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 고백의 배경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그곳에 드러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희도 매주 예배 때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신앙 고백을 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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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11月09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