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11月02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11月2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フィリピ(빌립보서) 4章 6~7節
〇讃 頌 讃頌歌 36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69 (イザヤ40章 )
〇讃 頌 讃頌歌 144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6章 1~12節
〇説 教 「パン種に注意しなさい (누룩을 주의하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40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11月 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パン種に注意しなさい」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6章 1~12節
イエスさまはデカポリス地方から舟に乗ってマガダン地方へとガリラヤ湖を渡られました。すると、そこにイエスさまに敵対するファリサイ派とサドカイ派の人々が来て、「天からのしるし」を見せて欲しいと迫ります。
以前にも、12章で律法学者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同じようにイエスさまの前にやってきて、しるしを見せよと迫りました。彼らが言う「天からのしるし」というのは、様々な奇跡の業ということではなくて、エルサレム神殿の勢力を世界規模に高めて、周辺諸国を力でねじ伏せるような力のことでした。しかし、イエスさまは以前と同じく、「ヨナのしるし以外にはない」と答えられました。
イエスさまは3節で彼らにこう言われています。「あなたたちは、夕方には、『夕焼けだから、晴れだ』と言い、朝には『朝焼けで雲が低いから、今日は嵐だ』と言う。このように空模様を見分けることは知っているのに、時代のしるしは見ることができないのか。」(3節)
辛辣な言葉が彼らに投げかけられましたが、ファリサイ派やサドカイ派の人々の態度に現れているのは、イエスさまの教えとは違う古い習慣や制度や価値観、哲学などでした。この世の移り変わりについて目ざとく感を働かせる知恵が身についていたとしても、それで、神さまが語っておられる「時代のしるし」を見分けることはできません。イエスさまの内に神さまの力を見たかどうかは、イエスさまの御業に触れた一人ひとりが信仰によって答えて行かなくてはならないのです。
神さまがいるのなら証拠を見せよ、救いがあるならば証拠を見せよ、と世の中は要求するかも知れません。目に見える証拠がなければ神さまについても救いについても誰も確かなことは言えない、と、宗教は遠ざけられるかも知れません。しかし、そのような時代に対して、イエスさまは「よこしまで神に背いた時代の者たちはしるしを欲しがる」(4節)と言われました。証拠は、「ヨナのしるし」をおいて他にはありません。「ヨナのしるし」とは、12章で語られていますように、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で死んで葬られた後、三日目に復活されたことを指しています。イエス・キリストの復活を証言する聖書が、今私たちが神さまを信じる時に手掛かりとする唯一の証言です。
ファリサイ派とサドカイ派の人々を後に残して、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をガリラヤ湖の対岸に行かれました。これは敢えてイエスさまが、弟子たちを彼らから分離させようとしたのでしょう。そして、弟子たちに「ファリサイ派とサドカイ派の人々のパン種によく注意しなさい」(6節)と注意しています。
弟子たちも皆ユダヤ人ですから彼らの教えを知っていたはずです。ですから、ファリサイ派やサドカイ派の人々が教える「古いパン種」によって、イエスさまが誰であるかを見誤ることがないようにと、警告をなさったわけですね。けれども、ここで明らかになったのは、弟子たちの軽率さでした。弟子たちはイエスさまの話を聞いて、この「パン種」を文字通りのパンと取り違えました。その理由は、パンを買い忘れたという自分たちの目先の失態に気をとられていたせいでした。8節以下のお叱りの言葉にありますように、パンのことならイエスさまと一緒にいれば心配する必要はなかったはずです。つい先だって「パンの奇跡」を体験したわけですから。けれども、そういうイエスさまの奇跡も、弟子たちには人生の変わる様な体験にはならず、彼らは相変わらず目先のことやお腹を満たすことで頭が一杯で、イエスさまの教えに神さまの声を聞きと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この弟子たちの姿から教えられるのは、私たちの世俗性です。神さまのことよりも人のことが気がかりで、この世が終末を迎えて神さまの裁きが始まるということよりも、今日のランチは何にしようかとお腹のことが気になってしまう、どうしようもない私たちの視野の狭さです。ある意味、これはファリサイ派やサドカイ派の人々の態度と共通しています。彼らもまた、イエスさまに顕わされた時のしるし、そこで神さまが私たちの現実の生活に直接手を触れて来られたことを真剣に受け取ることなく、死に定められているこの世界の中での小さな自分の生き方にあくせくもがいているだけの憐れな人の姿です。
しかし、イエスさまはこうした弟子たちをお見捨てにはなりません。だから「信仰の薄い者たち、… まだ分からないのか。覚えていないのか」(8-9節)と叱責されます。「ちゃんと私を見なさい」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先に13章で種まきの譬えを話されて、石地に蒔かれて根がないために枯れてしまった種や、茨が塞いで成長できなかった種に例えて、不信仰な時代の有り様に触れておられました。実に、イエスさまに従った弟子たちもそのような拙い信仰から始まっています。宗教改革者カルヴァン人は、誰もが信仰の種を持っている言いましたが、誰しも信心があって、それを尊ぶ土壌があればいくらかの芽を出すことは可能です。けれども、今、私たちが生きる時代は、人の罪に対する神さまの裁きが明らかにされた時であって、誰もが自分の命の在り方を神さまの前ではっきりと定めなくてはならない、終りの時代です。それが、私たちが見分けなくてはならないイエス・キリストに顕わされた時のしるしというものです。
イエス・キリストは御自身の十字架で罪に対する神さまの裁きを示されました。そこに顕わされたのは、神さまに見捨てられた者の死にゆく姿です。キリストは、いわば人類の代表として十字架で死なれました。そこに私の姿を見出す者は、イエスさまの十字架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す。つまり、イエス・キリストは私の代わりにその十字架についたのです。それを信じる者には、やがて、キリストと共に復活の命を受けることになります。
「ヨナのしるし」は、死にゆく私たちに示された、復活の命の希望なのです。ですから、「ヨナのしるしのほかには、しるしは与えられない」とイエスさまは仰っ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がすべての人に問うておられるのは、真の信仰です。それを否定して得るものは一体何か。自分の立場や対面か、今の安定した暮らしか、または、人から馬鹿にされたくないという自尊心か。けれども、そうした自分も、やがてはすべてを捨ててこの世を去らねばなりません。静かに、周囲の人々に看取られて幸せに死んでゆくのが人の理想かも知れません。
けれども、聖書が告げている人の死に様は、十字架です。生ける神さまの前で裁きを受けて死んでいく罪人の姿です。その死を免れることのできる人は一人もいない、というのが聖書の告げる真実です。
聖書の福音は、この誰も免れるこのできない死から、キリストと共に復活するという希望なのです。
この後、これは来週読む聖書箇所ですが、弟子たちはフィリポ・カイザリアでイエスさまに改めて信仰を問われます。「あなたがたは私を何者だと言うのか」。ペトロが答えて「あなたはメシア、生ける神の子です」と真の信仰の告白をしました。
イエスさまはその命をもたらす告白に導くために弟子たちを伴って行かれます。彼らのために十字架で御自分の命を捨て、罪の赦しを得て、復活の栄光をお受けになります。復活したイエスさまに出会った弟子たちは、もはや「信仰の薄い者たち」ではなく、身も心もイエスさまのものになって、復活の福音を宣べ伝えながら生きる真の信仰者になりました。救いの道は、こうして確かに教会を通してこの世界に開かれています。イエス・キリストは多くの人々をここに招かれ、私たちを終りの復活に導いてくれます。
皆さん、私たちは確かな信仰を持ちながら、世の中の風潮や生活のしがらみに惑わされないで、イエス・キリストが示された終りの復活を目指していきたいと願います。
【2025년 11월 2일 주일예배(요약판)】
“누룩을 주의하라”
마태복음 16장 1~12
예수님께서는 데가볼리 지방에서 배를 타시고 마가단 지방으로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12장에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도 똑같이 예수님 앞에 와서 표적을 보여달라고 같은 요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여러 기적이나 이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세력이 세계적인 규모로 권세를 얻게 되어 주변 나라들을 힘으로 제압하는 그런 세속적인 힘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3절에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3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매우 날카로운 책망이었습니다. 그들의 태도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낡은 제도나 습관, 가치관 철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변화에는 민감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시대의 표적”은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힘을 보았는지 아닌지는 예수님의 사역을 체험한 각 사람이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이 있다면 증거를 보여라, 구원이 있다면 증거를 보여라, 라고 요구합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으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구원에 대해서도 믿을 수 없다고 하며 종교를 멀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에 대해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증거는 “요나의 표적” 밖에 없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마태복음 12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 일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성경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실마리가 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뒤에 남겨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은 굳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그들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6절)고 경고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모두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가르치는 “오래된 누룩”으로 인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잘못 이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주의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누룩”을 문자 그대로 빵의 재료로 오해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빵을 준비하지 못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고, 떡 일곱개로 사천명을 먹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느냐”(8~9절)
빵이 부족한 일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한 먹을 것 때문에 염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막 일어난 “오병이어의 기적”조차 인생을 바꾸는 믿음의 체험으로 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눈앞의 일, 당장의 배고픔에만 마음이 쏠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치를 더 보고, 이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보다 오늘의 끼니와 세속적인 문제에 더 마음을 쓰는 그런 좁은 시야속에 사는 우리를 보여줍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또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표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결국 죽음이 예정된 세상 속에서 자기 삶만 붙들고 악착같이 발버둥치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8-9절)하시며 꾸짖으시지만, 동시에 “제대로 나를 보라”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3장에서 파종의 비유를 말씀하셨고, 돌밭에 뿌려져 뿌리를 내리지 못한 씨앗과 가시덤불에 막혀 자라지 못한 씨앗에 비유하여 불신앙의 시대의 모습을 언급하셨습니다. 실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그런 연약한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누구나 신앙의 씨앗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나 믿음이 있고 그것을 존중하는 토양이 있으면 얼마간의 싹을 틔우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밝혀진 때이고, 누구나 자신의 생명 본연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정해야 하는 종말의 시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분별해야 할 시대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죽음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전체의 대표로서 그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그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믿는 자에게는 곧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생명이 주어집니다.
“요나의 표적”은 죽음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보여주신 부활의 희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묻고 계신 것은 진정한 신앙입니다. 그 믿음을 부정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지위나 체면, 지금의 안정된 생활, 아니면 남들로부터 무시당하기 싫은 자존심일까요? 그러나 그 모든 것도 결국은 다 버리고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조용히 가족과 지인들의 보살핌 속에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사람들의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죽음은 십자가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죽어가는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성경의 복음은 이 누구도 면할 수 없는 죽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희망입니다.
이 후의 본문(다음 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생명의 고백으로 제자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시고, 죄 사함을 이루시며, 부활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더 이상 “믿음이 작은 자”가 아니라 몸도 마음도 예수님의 것이 되어 부활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참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길은 교회를 통해 지금도 세상 가운데 확실히 열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그 길로 초대하시며 우리를 종말의 부활로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의 풍조와 삶의 굴레에 현혹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부활의 소망을 향해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