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10月26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10月26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11章 1~2節, 10節
〇讃 頌 讃頌歌 3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67 (箴言3章 )
〇讃 頌 讃頌歌 251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5章 29~39節
〇説 教 「信じることを妨げるもの (믿음을 방해하는 것)」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00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10月 2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信じることを妨げるもの」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5章29~39節
今日の聖書箇所は、マタイによる福音書14章13~21節の内容と酷似しています。そこの出てくる数字が違うぐらいで、他はほとんど同じです。ただ、ここで不思議に思うのが、弟子たちとのやり取りです。
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に言われました。「群衆がかわいそうだ。もう三日もわたしと一緒にいるのに、食べ物がない。空腹のままで解散させたくはない。途中で疲れきってしまうかもしれない」(32節)。
すると弟子たちは答えました。「この人里離れた所で、これほど大勢の人に十分食べさせるほどのパンが、どこから手に入るでしょうか。」(33節)
「どこから手に入るでしょうか」と弟子たちは言っていますが、ほんの数日前に、どこから手に入るのかを見ていたはずですよ。イエスさまが無いに等しい物を溢れるほど増やしてくださったことを体験したはずです。それなのに、弟子たちは「どこから手に入るのでしょう」と聞くなんておかしな話です。
でも、それが、人間の現実なのだと思います。つまり、人は一回や二回、奇跡を見たからといって、そう簡単には信じられないのです。「私はあの時イエスさまにこんなふうに助けていただきました。」「以前、こんなに素晴らしい神さまの祝福をいただきました。」そういう有り難い体験があったとしても、必ずしも「信仰」には繋がらないのです。一度、体験させてもらった神さまの恵みを、次の問題に当てはめることが出来たら、どんなに安らかに暮らして行けることでしょう。でもなぜか、そういうことが私たちは苦手なのです。
この弟子たちも、以前体験した奇跡をそのまま、今の状況に当てはめて、「七つのパンと少しの魚」を差し出しながら、「イエスさま、私たちにはこれしかありませんが、どうか、これでこの大勢の人たちを助けてあげて下さい」と言えば良かったわけですが、どうしたわけか、彼らには出来なかったのです。
一体何が、彼らの信仰を妨げていたんでしょうか。あんな大きな奇跡を体験したのに、なおもイエスさまの恵みを、救いの力を信じることが出来ないのです。
そして、私たちはどうなのでしょうか。私たちも、弟子たちのように、既に何らかの神さまの恵みを体験しているのではないですか。自分の人生において何らかの奇跡と言えることを体験したはずです。それなのに、なおもイエスさまのことを信頼できないわけは、一体何でしょうか。
実は、弟子たちには、信じることを難しくしていた一つの妨げがありました。それは、今回の四千人の人たちが、異邦人だったことです。マルコの福音書によれば、この場所はガリラヤ湖の辺でも特に、異邦人、ユダヤ人にとっての外国人が住んでいたデカポリスという地方でした。ですから、ここに集まっていた四千人も、異邦人だったと思われます。ユダヤ人たちにとって、食事を共にする、とりわけ食事を異邦人と分け合うのは、とても抵抗がありました。
つまり、イエスさまの恵みを信じることを妨げていたものは、弟子たちの内にある「ある種の偏見」だったのです。「神さまは、こういう人たちには、あんな奇跡など起こすはずがない」という偏見が、恵みの御業を信じられないようにしてい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は、そんな彼らの偏見を打ち破りました。四千人の異邦人たちのためにも、同じように「パンの奇跡」を行なわれて、全ての人をもれなく満腹にさせたんです。残ったパンくずを集めたら「七つの籠」に一杯いでした。因みに、前回は「十二の籠」でした。数が減っている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が、この籠は、韓国語では、「七つの광주리」と「十二の바구니」と訳されていて、大きさ形の違う籠です。恐らく「七つの籠」の方がより多く残っていたようです。つまり、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の偏見」をよそに、異邦人に対し、惜しみない恵みの御業を行われたということです。
ところで、私たちにもイエスさまの恵みを信じることを妨げているものがないでしょうか。本当は、もっと簡単にイエスさまの恵みを信じられ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前にもイエスさまは、こうやって私を助けて下さった。だから、今度も主は助けて下さる」と。
でも実際には、信じることを邪魔するものが、色々あると思のです。旧約聖書に記されているイスラエルの民たちは、出エジプトの時もそうだし、約束の地カナンに入るときも奇跡を体験しました。あの奇跡は一度体験したら、忘れられ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時代が変わっても、記憶として、確かに後代の人々に必ず受け継がれていくものです。
しかし、人間というものは、記憶はあったとしても、何か新しい問題にぶつかると、神さまへの信頼が薄れて来るのです。以前は、救っていただいたけれども、今回も本当に救って下さるのか、という疑いが湧いて来るのです。そのうち、前に体験した救いの恵みまで疑って、「世の中そんなに甘くない。きっと以前は偶然助けられたに過ぎない。そんな偶然、何度も続くわけない」と思ったりするのです。
そんな私たちは、今日の「四千人のパンの奇跡」を、よく心に留めておくべきだと思います。特に、この奇跡の中心におられて、以前の奇跡の時と全く同じように語って振る舞われるイエスさまのお姿を、心に刻み付けたいと思うのです。
イエスが、以前と全く同じ仕方で、「パンの奇跡」を起こされたのは、疑う弟子たちに、「わたしの救いのわざは、偶然なんかではない。わたしが望むなら、何度でもこの奇跡はあなたの上に起こるんです」と、伝えたか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たちは本当に弱い存在です。どんなに大きな救いの恵みを体験していても、新しい問題にぶつかると、ちょっと事情が違っただけで「もうダメだ」と思うのです。せっかくの恵みの体験が、なかなか信仰に繋がりません。ですから、私たちの信仰にとって大事なことは、そんな私たちのことをイエスさまはいつも憐み深く顧みて下さるという信頼、この信頼をいつも温め続けて行くことです。
皆さん、「パンの奇跡」は、私たちのために何度でも繰り返されるのです。ですから、いかなる時も、イエスさまの恵みに信頼して、ひたすら神さまの祝福を待ち望む人生を、喜んで、感謝と確信を持って、歩んでいきたいと願います。
【2025년 10월 26일 주일예배(요약판)】
“믿음을 방해하는 것”
마태복음 15장 29~39
오늘의 성경 부분은 마태복음 14장 13~21절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등장하는 숫자가 다를 뿐 거의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다”(32절).
그러자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33절)
“어디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제자들은 말하고 있지만, 불과 며칠 전,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셔서 무리를 배불리 먹이신 것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도 제자들은 “다시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사람은 한두 번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믿음을 지키는 존재가 아닙니다. “저는 그때 예수님께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이렇게 훌륭한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했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가 있어도, 그것이 언제나 확고한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다음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잘 하지 못합니다.
이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경험한 기적을 그대로 지금의 상황에 적용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저희에게는 이 일곱 개의 떡과 몇 마리의 작은 물고기밖에 없습니다. 주님, 이것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시옵소서.” 라고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의 믿음을 방해한 걸까요? 그런 큰 기적을 체험했는데도 여전히 예수님의 은혜와 구원의 능력을 믿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미 어떤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예수님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사실 제자들에게는 믿는 것을 어렵게 했던 한 가지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번에 4천 명의 사람들이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이 곳은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도 특히 이방인, 유대인에게 외국인이 살던 데가볼리라는 지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모여 있던 4천 명도 이방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매우 꺼려지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제자들의 믿음을 방해했던 것은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모종의 편견”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까지 그런 기적을 베푸실 리가 없다”라는 편견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편견을 깨뜨리셨습니다. 4천 명의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떡의 기적”을 행하시고 그들 모두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어 보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참고로 앞의 오병이어 사건에서는 “열두 바구니”였습니다. 숫자만 보면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광주리와 바구니는 크기가 다릅니다. 아마 “열두 바구니”보다 “일곱 광주리”가 더 많이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의 편견”을 무시하고 이방인에게 아낌없는 은혜의 역사를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은혜를 믿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은 더 단순하게 “전에도 예수님께서 나를 이렇게 도와주셨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다”라고 믿으면 될 일인데 우리는 쉽게 믿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출애굽할 때도 그렇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도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런 기적은 한번 체험하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대가 바뀌어도, 기억으로 남아 전해져야할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면 하나님의 신뢰가 약해집니다. 전에는 구해 주셨지만, 이번에도 과연 도와 주실까? 하는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심지어 과거의 은혜마저도 의심하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건 단지 우연이었겠지. 그런 우연이 몇 번이고 계속될 리가 없다” 라고 스스로 부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의 “4천 명을 먹이신 기적”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이 기적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은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말씀으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려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내 구원의 역사는 우연이 아니다. 내가 원한다면 몇 번이라도 이 기적은 너의 삶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큰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여도 상황이 조금만 달라져도 “이번에 안될거야” 라고 낙심합니다. 받은 은혜가 믿음으로 이어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에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를 예수님은 언제나 긍휼히 여기시고 돌아보시는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떡의 기적”은 한번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의 삶 가운데 그 기적을 반복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은혜를 신뢰하며, 감사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실 축복을 기쁘게 기다리는 인생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