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年01月18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1月18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ガラテヤ(시편) 85編 9(10)~11(12)節
〇讃 頌 讃頌歌 10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4 (詩編 5編 )
〇讃 頌 讃頌歌 149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17章 22~27節
〇説 教 「神の子の自由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07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1月 1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子の自由」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7章 22~27節
今日の聖書箇所の22~23節では、イエスさまがユダヤ当局に引き渡され殺されてしまうが、三日目に復活するということが語られております。以前にも、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に、ご自分の死と復活について語られていました(16章21節)。
その時には、ペトロが、「そんなことがあってはなりません」(16章22節)とイエスさまをいさめました。それに対し、イエスさまそれは「サタン、引き下がれ」(16章23節)と激しくお叱りになりました。そのため、今回は誰もイエスさまのこの言葉に反論するものはいませんでした。この時の弟子たちの反応はどうだったのか言いますと、23節に「弟子たちは非常に悲しんだ」とあります。
弟子たちはイエスさまの言葉を複雑な気持ちで聞いたのでしょう。イエスさまが殺されてしまう。弟子たちはこの言葉に囚われてしまい、他は何も考えられず、肝心の次の言葉「三日目に復活する」という言葉を聞き洩らしています。
人は信じられないことは耳に入って来ません。希望に満ち溢れた聖書の言葉も耳に入らないのです。その結果、弟子たちは悲しみに浸っておりました。彼らは悲しみをひきずりながら、イエスさまについて行っていたのです。
先週、「からし種一粒ほどの信仰があれば」という話をしました。私たちの信仰は真に小さな信仰に過ぎません。だからこそ、主なる神さまに全面的に信頼し、祈り続けるしかない。でも、祈り続ける中に神さまの大きな御業が起こるのだという話をしましたが、私たちは、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を信じております。また、未来において神さまの御国に入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も信じております。ところが、今の生活において、何をしても現状は変わらないと思ってしまい、神さまに依り頼もうとしないところ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自分の願いと現実のギャップの狭間で、だましだましの信仰生活を送ってはいないでしょうか。本当に小さな信仰で良いから、神さまに期待し、神さまならできると信じて生きたいと思います。
弟子たちには、自分の願いと現実のギャップのある中で、この「からし種ほどの信仰」が必要でした。現実を受け入れられない。だからこそ、最後まで神さまに依り頼むという信仰が必要だったのです。
そして、弟子たちはまた厳しい現実に直面いたします。24節です。「神殿税を集める者たちがペトロのところに来て、『あなたたちの先生は神殿税を納めないのか』と言った。」(24節)
神殿税というのは、出エジプト記30章11節以下に定められた規定に従って、ユダヤ人成人男子が年に一度、過越祭が始まる1ヶ月前ぐらいに神殿に納める税金です。もし、この神殿税を支払わなければ律法違反としてユダヤ当局に捕まってしまいます。そのため、ペトロは「納めます」と即答しました。イエスさまご自身が、ユダヤ当局に引き渡され、殺されてしまうと言われましたから、ペトロとしては、何とかそれを避けたいわけですね。
そんなペトロにイエスさまはこのように質問をされました。25節です。「シモン、あなたはどう思うか。地上の王は、税や貢ぎ物をだれから取り立てるのか。自分の子供たちからか、それともほかの人々からか。」(25節)
ペトロが「ほかの人々からです」(26節)と答えると、イエスさまは「では、子供たちは納めなくてよいわけだ」(26節)と言われます。
神殿は神さまの宮です。そして、自分たちは、神さまの子供です。そうであるならば、神さまの子供は、親である神さまのための税金を払わなくてもよいと、イエスさまはおっしゃ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の言葉は非常識に聞こえますが、イエスさまが言われているのは、「私たちは神さまの子どもであ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そして、イエスさまはこのように言われました。「しかし、彼らをつまずかせないようにしよう。湖に行って釣りをしなさい。最初に釣れた魚を取って口を開けると、銀貨が一枚見つかるはずだ。それを取って、わたしとあなたの分として納めなさい。」(27節)
ペトロはこのイエスさまの言葉に従い神殿税を支払ったのでしょう。でも、よくよく考えて見ますと、この1ヶ月後には過越祭が始まり、その時に、イエスさまはエルサレムで十字架刑にお架かりになります。その十字架にイエスさまをつけようとしたのがまさに神殿当局です。この不当な扱いを目の前にして、神殿当局から指示があったその税金をイエスさまは納められたと言うことです。
それにしても、神殿税を納めるのに、わざわざ奇跡的な手段をとられたのはなぜでしょうか。このような奇跡に頼らなくても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に預けていた財布からご自分とペトロの税金ぐらいは払えたはずです。それは、イエスさまが神さまに献げる税金を支払う必要のない神さまの子ども、メシアであることをはっきりと弟子たちに示すためのものでした。
そして、イエスさまが納める義務のない税金を納めるのは、世間の人に「つまずきを与えないため」でした。イエスさまは他人につまずきを与えないために、ご自分の権利や自由をを制限されました。イエスさまは普通の人と同じように、社会的義務もすべて果たされ、法律も遵守されました。これは、弟子たちに神さまの子どもとして、世の光、地の塩として、世にある人たちに、神さまの愛と義を示していく、善いことを示していく、という積極的なメッセージがあり、イエスさまはその模範を示されたのでしょう。
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5章13節にこのような言葉が記されています。「兄弟たち、あなたがたは、自由を得るために召し出されたのです。ただ、この自由を、肉に罪を犯させる機会とせずに、愛によって互いに仕えなさい。」(ガラテヤ5章13節)
ここには、自由をどのように使ったらいいのかということが教えられています。「この自由を、肉に罪を犯させる機会とせずに、愛によって互いに仕えなさい」とあります。愛のために、互いに仕え合うために使いなさい、と言われています。
私たちは、神さまの子どもとして自由が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が、その自由は、イエスさまがご自身の自由を放棄し、どこまでも人を愛されたがゆえに、与えられた自由です。イエスさまが与えてくださった自由だと言えます。だからこそ、その自由はイエスさまのために、イエスさまを模範として、イエスさまの生き方に倣って、愛のために、互いに仕え合うために、与えられた自由を使っていくのです。
与えられた自由によって愛する、互いに仕え合う。これは、別の言い方をしますと、愛すること、互いに仕え合うことを自主的に、自覚的に行うということです。人に強いられて行うとか、人に強いて行わせ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
皆さん、私たちの信仰の歩みというのは、人からああしなさい、こうしなさい、と言われてす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一人一人が神さまの御言葉を聴き、神さまに出会い、向き合い、そこから促されて、自分で決断して行うものです。そして、それこそが、神さまの子どもの自由、神さまが教えてくださる自由な生き方なのです。
【2026년 1월 18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
마태복음 17장 22~27절
오늘의 성경 본문 22~2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대 당국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시게 될 것과, 그러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도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16장 21절).
그때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장 22절)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만류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16장 23절)라고 하시며 매우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아무도 예수님의 이 말씀에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2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매우 근심하더라”(23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매우 복잡한 심정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다는 말에 마음이 사로잡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정작 중요한 다음 말씀인 “사흘 만에 살아나시리라”는 말씀은 듣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사람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소망으로 가득 찬 성경의 말씀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슬픔에 잠기게 되었고, 그 슬픔을 안은 채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다면”이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작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계속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있으며,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의 삶 속에서는 아무리 애써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의 소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 속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좋으니, 하나님께 기대하며 “하나님이라면 하실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제자들에게도 바로 이러한 겨자씨만한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또 하나의 엄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24절의 말씀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24절).
이 반 세겔, 곧 성전세는 출애굽기 30장 11절 이하의 규정에 따라 유대인 성인 남자가 해마다 한 번, 유월절이 시작되기 약 한 달 전에 성전에 바치는 세금이었습니다. 이 성전세를 내지 않으면 율법을 어긴 것으로 간주되어 유대 당국에 붙잡힐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망설임 없이 “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자신이 유대 당국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베드로로서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25절입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들에게냐 타인에게냐”(25절)
베드로가 “타인에게니이다”(26절)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26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위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상식적으로 들으면 매우 파격적으로 들리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핵심은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27절).
베드로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세를 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로부터 한 달 후에 유월절이 시작되고,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성전 당국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게 됩니다. 그러한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실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 당국이 요구한 세금을 기꺼이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성전세를 마련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맡고 있던 돈주머니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몫과 베드로의 세금을 지불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적을 행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낼 의무가 없는 세금을 내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반 사람들과 동일하게 사회적 의무를 다하셨고, 법도 지키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며,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선한 모습으로 드러내라는 적극적인 메시지이며, 예수님께서 친히 그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라디아서 5장 13절)
이 말씀은 우리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자유는 죄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서로를 섬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자유를 내려놓으시고 끝까지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어진 자유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유를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사랑을 위해, 서로 섬기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자유로 사랑하고, 자유로 서로 섬긴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발적으로, 스스로 깨닫고 선택하여 사랑하고 섬긴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에게 강요받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길은 누군가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해서 걷는 길이 아닙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스스로 결단하며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자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참으로 자유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