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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08月24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8月24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34編 9(8)~10(9)節
〇讃    頌    讃頌歌 2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49 (詩編108編 )
〇讃    頌    讃頌歌 526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3章 24~30節
〇説   教    「毒麦が混じった麦畑
          (가라지가 섞인 밀밭)」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86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8月 2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毒麦が混じった麦畑」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3章 24~30節


 今日の聖書箇所は「毒麦のたとえ」話です。「毒麦」というのは、小麦や大麦の畑に育つ雑草なのですが、苗が若い時期は麦と非常に良く似ていて、ほとんど見分けがつきません。そのため、ユダヤ人はこれを「偽りの麦」と呼んだそうです。しかし、穂が出て来ると、その違いが分かり、子どもでも間違うことはないそうです。その時に抜けば良いと思われますが、その頃には麦と毒麦の根が絡み合っているので、毒麦を抜き取れば、良い麦の根まで抜けてしまいます。そのため、刈り取るまで、そのままにして置かなければならないわけですね。刈り取った穂を麦と毒麦に分け、麦を脱穀後にも混じっている毒麦を選り分けるのが普通でした。
 ですから、イエスさまが語られた「毒麦のたとえ」は、当時の農夫ですと、誰でも知っているような話であるわけです。イエスさまは誰でも知っているような話をここで語られているのは、この話が、先に語られた「種を蒔く人のたとえ」と関連したものとして語られているからです。


 「種を蒔く人のたとえ」では、良い土地に落ちた種は、成長して30倍60倍100倍もの実を結ぶという話でした。今日の「毒麦のたとえ」では、良い種が畑(良い土地)に蒔かれ、成長し、豊かな実を結んだわけですが、気づいてみるとその中に毒麦が混じっているわけです。そこで僕が主人に「だんなさま、畑には良い種をお蒔きになったではありませんか。どこから毒麦が入ったのでしょう」(27節)と聞きます。僕たちは、畑を十分に耕し、良い土地にして、そこに確かに良い種を蒔いたのです。良い実だけが実るはずでした。それが、種が成長し、実がなって見るとその中に毒麦がある、と。これはどうしたことかとなるわけですね。
 そこで、僕たちは慌てて「では、行って抜き集めておきましょうか」(28節)と言いましたが、イエスさまは「いや、毒麦を集めるとき、麦まで一緒に抜くかもしれない。刈り入れまで、両方とも育つままにしておきなさい。刈り入れの時、『まず毒麦を集め、焼くために束にし、麦の方は集めて倉に入れなさい』と、刈り取る者に言いつけよう」(29-30節)と言われます。


 弟子たちはこの譬え話を聞いて、良くわからなかったのでしょう。36節以降に、弟子たちが譬え話の解き明かしを求める場面があります。イエスさまはこう言っています。「良い種を蒔く者は人の子、畑は世界、良い種は御国の子ら、毒麦は悪い者の子らである。そして毒麦を蒔いた敵は悪魔だ」(37-39節)とあります。つまり、イエスさまが良い麦を蒔き、悪魔も毒麦を蒔いた畑は私たちの生きている世界です。そして、私たちは麦です。しかし、私たちが良い麦か毒麦かは今のところ分かりませんが、実った時にそれが分かるようです。そして、最終的にはその毒麦は収穫の時にまとめて燃え盛る火の中投げ込まれ、良い麦だけが残る。これが天の国(神の国)であると説明しておられるように聞こえます。


 さて、この説明を聞いて何だか怖いなあと思うのは、果たして私はイエスさまが蒔いた良い麦なのだろうか、それとも悪魔が蒔いた毒麦なのだろうかと心配になるからです。毒麦はいくら丹精込めて育てても途中から良い麦に変化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今、私は教会にいるけれども、自分がもし毒麦であるならば、収穫の時には焼き捨てられるではないかと心配になるのは当然です。なぜなら、自分が麦なのか、毒麦なのか、それが分かるのは実をつけなければ分からないからです。

 ある異端のグループはイエスさまのこの言葉を文字通り解釈して、「麦は麦であり、毒麦は毒麦である。サタンに蒔かれた者たちの本性は決して変わらない。そしてその人たちは切り捨てられなければなけない。麦が麦として実るためには、神を第一とし、自分たちが神に従うための障害となるもの、例えばそれが、家庭の幸せであってもそれらを捨て去らなければいけない」と主張しています。
 つまり、良い麦として実るためには、天の国に入るためには、永遠のいのちを得るためには、この地上のかりそめの家族や家庭の幸せを捨てて神さまのために生きること。これが救いに選ばれている信仰者の姿だと言い、それが出来ない人はサタンの子であり救われない者なの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


 でも、これはイエス・キリストの歩まれた道、その教えとははっきり違うと言えます。そもそも天の国というのは、正しい人や信仰深い人だけが入れるところなのでしょうか。もし、神さまを信じる正しい人たちだけが天国に入れて、罪人が地獄に行くのだとしたら、それはファリサイ人、律法学者の世界と変わりません。それでは「私は罪人を招くために来た」と言われたイエス・キリストの存在自体が自己矛盾に陥ってしまいます。
 イエスさまは言われました。「神が御子を世に遣わされたのは、世を裁くためではなく、御子によって世が救われるためである」(ヨハネ3:17)と。
 私は、この譬え話が天の国の譬えだとしたら、この裁きの後に訪れるものが「天の国」なのではなく、むしろ良い麦の中に毒麦が蒔かれた畑を主人が見守っているそのこと自体が、天の国なのではないかと思うのです。


 なぜ、イエスさまは毒麦が実るまで待とうと言われ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毒麦と呼ばれる人たちが神さまが見守る畑と言う環境の中で、いつか神さまの御許に立ち返ることを、イエスさまは願っておられるからです。
 先ほど、毒麦は毒麦のまま、毒麦は決して麦にはなれないと言いましたが、これが私たちの常識です。しかし、イエスさまは悪魔が蒔いた毒麦も麦に変わって行く、つまり悔い改め、神さまの御許に立ち返る可能性を信じておられるのです。つまり天の国とは、敢えて毒麦が共に育ち、この主人の恵みの元で毒麦が方向転換していくことを共に喜ぶところだと思うのです。


 そしてまた、私たちはこの譬え話から考えるべきことがあります。それは、この僕たちのように、私たちの基準で善悪を決め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彼らは主人のことを思って、毒麦を引っこ抜こうとしますが、それは主人の思いに適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熱心さのゆえに人を裁くことがあります。しかしそれは、私たちは神さまのためにと思いながらも神さまの御計画とは違うことをして、自分の思いを満たそうとしているということがあるのです。それが私たちの罪であります。


 人がエデンの園から追放されたきっかけは、「善悪を知る木の実」を食べたことによります。それによって人は自分で善悪を考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しかし、果たしてその判断が神さまの御心と同じかと言われると、やはり異なるのです。むしろ私たちはその思いによってイエス・キリストを十字架に架け、世界を分断してしまっているのです。
 そもそも私たちが良い麦で敵が毒麦であるという思い込み自体が危険だと思いますし、そうした裁きの心を持つときに私たちこそが毒麦になってしまう可能性があることをしっかりと認識しなくてはなりません。


 さらに言えば、毒麦だって神さまが「良し」とされた創造物の一つであり、それを邪魔だと思うのは私たちの側の問題です。神さまの目において良い麦と毒麦はどう違うのかというと、そこには違いがあるということだけな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そこで毒麦を抜くのではなく良い麦も毒麦も共に生きていけと語られるのです。毒麦もある良い麦もある、それが神さまが見守る天の国の中で共に育つのです。それがイエス・キリストの愛であり、神の国、良い畑な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2025년 8월 24일 주일예배(요약판)】

      “가라지가 섞인 밀밭”  
                             마태복음 13장 24~30절


  오늘의 성경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가라지는 보리나 밀밭에 자라는 잡초인데, 모종이 어릴 때에는 말과 매우 비슷해서 거의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것을 ‘거짓 밀’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삭이 패기 시작하면 차이가 분명해져서 어린아이도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때 가라지를 뽑으면 될 것 같지만, 이미 밀과 가라지의 뿌리가 얽혀 있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으면 좋은 밀의 뿌리까지 같이 뽑히게 됩니다. 그래서 추수할 때까지 그냥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거둔 이삭을 밀과 가라지로 나누고, 탈곡 후에도 섞여 있는 가라지를 골라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가라지의 비유”는 당시 농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상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런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의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좋은 씨가 밭(좋은 땅)에 뿌려져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는데, 알고 보니 그 가운데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27절). 종들은 밭을 잘 갈고, 좋은 땅을 마련해 분명히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당연히 좋은 열매만 맺혀야 하는데, 자라나서 열매를 맺고 보니 그 안에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종들은 황급히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28절) 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겠다”(29-30절)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비유를 듣고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36절 이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해석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니,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37-39절)
  즉, 예수님이 좋은 씨를 뿌리시고, 마귀도 가라지를 뿌린 밭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밀이지만, 우리가 좋은 밀인지 가라지인지는 지금 당장은 알 수 없고, 열매 맺을 때에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가라지는 수확 때에 모아 불에 던져지고, 좋은 밀만 남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설명으로 들립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면 마음이 두려워집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이 뿌리신 좋은 밀일까, 아니면 마귀가 뿌린 가라지일까?” 하는 걱정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아무리 정성껏 길러도 도중에 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교회 안에 있더라도 만일 내가 가라지라면, 추수 때 불태워질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밀인지 가라지인지는 열매를 맺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부 이단 단체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며 이렇게 주장합니다. “밀은 밀이고 가라지는 가라지다. 사탄이 뿌린 자들의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잘려 나가야 한다. 밀로 결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 심지어 가정의 행복까지도 버려야 한다.”
  즉, 좋은 밀로 결실하고,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잠시뿐인 가족이나 가정의 행복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탄의 자식이며,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원래 천국이라는 것은 의롭고 신실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까? 만약 하나님을 믿는 의로운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가고 죄인은 지옥에 간다면, 그것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논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가 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저는 이 비유가 천국의 비유라면, 이 심판 후에 오는 세계가 “천국”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밀 가운데 가라지가 뿌려진 그 밭을 주인이 인내하며 지켜보시는 바로 그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왜 예수님은 가라지가 자랄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가라지라 불리는 이들도 하나님이 돌보시는 밭이라는 환경 안에서 언젠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예수님께서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가라지는 가라지일 뿐 결코 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가 뿌린 가라지도 밀로 변화될 수 있다고, 즉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가능성을 믿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이란, 일부러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두시고, 주인의 은혜 가운데 그 가라지가 방향을 바꾸어 가는 것을 함께 기뻐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들처럼 우리 기준으로 선악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들은 주인을 위해 가라지를 뽑으려 하지만, 그것은 주인의 뜻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열심 때문에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일을 하며 자기 생각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게 되었지만, 그 판단이 과연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생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세상을 분열시켜 왔습니다.
  우리가 좋은 밀이고 다른 이가 가라지라는 생각 자체가 위험합니다. 그런 정죄하는 마음을 품을 때, 우리 자신이 오히려 가라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가라지조차도 하나님께서 “좋다” 하신 창조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을 방해물이라 여기는 것은 우리 쪽의 문제이지,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좋은 밀과 가라지의 차이는 단지 다르다는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라지를 뽑아내지 않고 좋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좋은 밀도 있고, 가라지도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천국의 모습이며, 그 안에서 함께 자라도록 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나라, 좋은 밭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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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08月24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