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08月03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8月3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요한복음) 6章 28~29節
〇讃 頌 讃頌歌 20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43 (詩編99編 )
〇讃 頌 讃頌歌 91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2章 46~50節
〇説 教 「主イエス・キリストの家族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59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8月 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主イエス・キリストの家族」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2章 46~50節
今日の聖書箇所は、家族がテーマとなっていますが、本当に信頼のおける、心から安らぐことのできる家族を持つことは、この世に生きる私たちにとって最上の幸せだと思います。聖書もそのことはよく知っていて、家族を大切にするように私たちを促してくれます。けれども、そうした人の望みと、罪の現実との間にあるギャップに人は苦しみます。聖書は、その人間の家族がもつ弱さをも隠すことなく明らかにしております。
人間の創造物語では、アダムとエバが体を分け合って創造され、互いに真のパートナーとして認め合いながら、二人で一つの体をもつような、切れない絆で結ばれた関係でした。それが、人間の堕落によって、エデンの園から追放されて以来、家族の関係にも亀裂が入り、その傷ついた関係の中に生まれてくる子どもたちも、同じ弱さをもった罪深い人間でした。アダムとエバの間に生まれた子どもであるカインとアベルも、兄が弟を殺すという家族関係が崩壊している姿をよく現しております。そこに人間社会の罪の深さが浮き彫りにされています。それに続く、聖書に登場する人物たちの家庭は、愛によって結ばれた理想的な家族とはとても言えません。
イスラエルの信仰の父であるアブラハムの家庭でも、正妻と側めの争いがあり、イサクの家庭でもヤコブとエサウの兄弟間で争いがあり、ヤコブの子どもたちの間でも分裂がおこり、ヨセフがエジプトに売られました。また、神さまの僕として召されたモーセにも、兄のアロンと預言者であった姉ミリアムとの間に権威を巡る争いが生じましたし、ダビデに油を注いだ預言者サムエルも息子たちはならず者でした。ダビデは神さまが選んだ比類のない王でしたが、ダビデの家庭は、姦淫の罪によって子を儲けるなどして、やがては子どもたちが王位を巡って殺し合うことになるほどの惨憺たる実情でした。
聖書に登場する家族は、どれも破れを負った人間の姿そのものです。家族無くして生まれてくる人は一人もいないはずなのに、いとも簡単に人と人の間の絆が壊れ、孤立した人間が世の中に溢れかえっているのは、人間が神さまから離れた結果であることを、聖書は私たちに教え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の血を分けた家族、母マリヤと弟たちがイエスさまを訪ねてきました。46節です。「イエスがなお群衆に話しておられるとき、その母と兄弟たちが、話したいことがあって外に立っていた。そこで、ある人がイエスに、『御覧なさい。母上と御兄弟たちが、お話ししたいと外に立っています』と言った。」(46-47節)
ここには、当時のユダヤ社会において、すべての事柄の中で家族のことを何よりも優先にするという価値観があったことが表れております。どういうことかと言いますと、イエスさまの話しを遮ってまで、家族が来ていることをイエスさまに伝えていて、それが当時の普通の価値観であり、家族との再会をイエスさまが喜ばれるであろうと期待しているわけですね。
しかし、イエスさまの反応は意外なものでした。48節です。「わたしの母とはだれか。わたしの兄弟とはだれか。そして、弟子たちの方を指して言われた。『見なさい。ここに私の母、わたしの兄弟がいる。だれでも、わたしの天の父の御心を行う人が、わたしの兄弟、姉妹、また母である。』」(48-50節)
イエスさまのこの反応は、まるで家族と絶縁しているような言い回しです。一方、母マリアや兄弟たちも部屋の中に入ることもせず、外に立っていて、人々の前で、イエスさまと話をするのをためらっている様子です。まことにおかしな関係になっております。
それは、恐らくユダヤ社会のリーダーであるファリサイ派の人々や律法学者たちを恐れてのことだろうと思いますが、イエスさまの家族はイエスさまが何をなさっておられるのかを理解出来ないでいたのです。むしろ、家族の安全と平安のために、ユダヤ社会のリーダーたちと争うようなことはすぐに止めて欲しいと考えていたのでしょう。それでイエスさまを説得するために来ていたのかも知れません。
イエスさまは決して家族を突き放したり、無視したのではありません。ただ、この時、イエスさまは人々にベルゼブル論争から始まる話の中で、イエスさまご自身の上に注がれる聖霊の力について議論され、それを信じない時代の暗さを指摘して来られました。人々は、聖霊によって神さまと繋がる道を聞いていたわけですが、それが霊ではなく、肉による家族がそこに来た時に、人々はその話の途中で、イエスさまとの繋がりを血の繋がりがある家族に譲ろうとしたわけです。そのために、イエスさまは、地上で血を分けた家族が、神の家族になるのではないことを教えられ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がこの地上におられた時に、人々は人としてのイエスさまに躓きました。13章53節以降を見ますと、故郷のナザレではまさにそのイエスさまの家族の故に、人々はイエスさまに躓いたとあります。ただの人間に過ぎないイエスを見ている内は、神の国の真実は理解出来ません。家族であれば尚更、息子であり、兄である人物を力ある救い主と見ることは不可能でしょう。イエスさまの内に神さまの働きを見、イエスさまを信じて神の国がやって来たことに救いを見い出すのは、イエスさまを信仰の目で見る弟子たちだけに許されます。これは今の時代でも変わらない真実です。人間イエスを探究して、その高い道徳や行動力に人類に対する不変的な意義を見出したとしても、そこに神さまの救いは見出されません。そうした世の中の関心と、聖書が人間に告げている神さまの救いとは別のものです。聖書が語るのは、罪のために滅びに向かう人間を救うために、十字架による罪の贖いと永遠の命への復活を果たす御子イエスさまを、この世に遣わされたことです。この神さまの救いの御業を信じずに、人となられた神の子に近づいても、救いを得ることは出来ないのです。
イエス・キリストは、家族を破壊するために来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既に壊れている人間の絆を修復するために来られたのです。家族のため、家族のためと言いながら、結局は利己主義から逃れられないで家族を壊してしまいかねないこの世に来られて、或いは、既に家族を失った孤独な人々のところに来られて、人が人と共に生きる希望を与えてくださるのがイエス・キリストです。そのイエス・キリストが「弟子たちの方を指して」すなわち、私たちの方を指して「見なさい。ここにわたしの母、わたしの兄弟がいる」と言っ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
この「弟子たちの方を指して言われた」という言葉は、韓国語聖書では「手を差し伸べて、弟子たちを指し示し言われた」と訳さ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が手を差し伸べて、「あなた方は私の家族だよ。私の家族として歩んでいこうよ」と、ご自分のもとに来る人たちに向かって言われているようです。
それにしても、イエスさまの肉の家族である母マリアと兄弟たちが「外に立っていた」ということが気になります。イエスさまとは誰よりも近い関係にある家族でありながら、実は、イエスさまとちょっと距離を取っているような態度です。皆さんはそうなってはいないでしょうか。礼拝に集い、聖書を読み、祈っている。でも、「外に立っている」ような、どこか、イエスさまとは距離をとって信仰生活をしてはいないでしょうか。
イエスさまが求めておられること、願っておられることは、ご自分のもとに来てほしい、ということです。ご自分が語る神さまの福音を聴いてほしい、ということです。だから、イエスさまは、ご自分のもとに来る人たちに手を差し伸べられたのです。
キリストに従い、父なる神さまの御心を行う人、その人たちが、キリストの兄弟、姉妹、母であり、そして、家族です。神の家族生活をどう送るかについては、新約聖書で様々な指針が与えられておりますが、今日はまず、その第一歩が、イエスさまのもとへ行くことであることを覚えたいと思います。
そして、イエス・キリストを仰ぎ望みながら、共に歩む中で、キリストにあって一つとなるということ、神の家族として一つになって歩んで行けますよう祈ります。
【2025년 8월 3일 주일예배(요약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
마태복음 12장 46~50절
오늘의 성경 본문은 ‘가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고 마음 깊이 안식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가족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기에, 우리에게 가족을 귀히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바람과 죄의 현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고, 우리는 그 틈에서 종종 고통을 겪습니다. 성경은 인간 가족의 약함과 상처를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창조 이야기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한 몸에서 나뉘어 창조되었고, 참된 동반자로서 서로를 인정하며 하나의 몸처럼 깊은 관계로 맺어졌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곧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부터 인간의 가족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 상처 입은 관계 속에 태어나는 자녀들 역시 죄의 약함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보듯, 형이 동생을 죽이는 비극은 가족관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인간 사회에 죄가 얼마나 깊이 자리잡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이후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가정도 이상적인 사랑의 공동체라기보다는, 깨어지고 상처입은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집에는 아내와 여종 사이의 갈등이 있었고, 그의 아들 이삭의 가정에는 야곱과 에서의 형제 간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자녀들 사이에도 분열이 일어나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받은 모세는 형 아론과 예언자였던 누이 미리암과 권력를 둘러싼 갈등을 겪었으며,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사무엘조차도 그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불릴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왕 다윗 또한 간음의 죄로 얻은 자식을 비롯해, 자녀들 간의 왕위를 둘러싼 살육과 음모가 이어지는 비극적인 가족사를 지녔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하나같이 상처와 죄로 얼룩진 인간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누구도 가족 없이 태어나지 않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는 너무도 쉽게 끊어지고, 이 세상은 외롭고 고립된 인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결과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46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46-47절)
이 장면에는, 유대 사회가 가족을 가장 우선시하던 당시의 가치관이 드러납니다. 가족이 왔다는 사실을 예수님께 일부러 알리는 것은, 예수님이 분명 기뻐하시리라 기대하고, 가족을 우선시하라는 압박이 담긴 행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다소 의외였습니다. 48절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48-50절)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께서 육신의 가족과 거리를 두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한편,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도 방 안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 있으며, 예수님과 대면하기를 주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다 이해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분이 위험한 길로 가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족을 외면하거나 거절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때 예수님은, 바알세불 논쟁에서부터 이어지는 긴 말씀 가운데, 자신 위에 임한 성령의 능력에 대해 가르치시며, 성령을 믿지 않는 세대의 어두움을 지적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과 연결되는 길을 듣고 있었지만, 육적인 가족이 등장했을 때 그들은 그 연결을 가족에게 양보하려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혈연이 곧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그분을 믿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3절 이하를 보면,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로 인해 오히려 믿음을 갖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사람이신 예수님만을 보며, 도덕적 인물이나 지도자로만 여기게 될 때, 하나님의 구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보고, 그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제자들만이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족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깨어진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족을 위하여”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이기심을 버리지 못해 가족을 해치기도 하는 세상에서, 또는 이미 가족을 잃고 외로움 속에 있는 이들에게 찾아오셔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소망을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즉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시며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셨다”는 것은 “너희는 나의 가족이다. 나와 함께 걸어가자”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이 “밖에 서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예수님과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는 하고 있지만, 혹시 “밖에 서 있는” 듯한, 예수님과 일정한 거리를 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각자가 그분의 곁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듣고, 주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신약 성경 곳곳에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지침들이 나와 있지만, 오늘은 그 첫걸음, 바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는 그 길 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