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07月20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7月20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51編 3(1)節, 12(10)節
〇讃 頌 讃頌歌 1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37 (詩編91編 )
〇讃 頌 讃頌歌 540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2章 38~42節
〇説 教 「神の言葉を信じるなら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42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7月 2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言葉を信じるならば」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2章 38~42節
律法学者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イエスさまに「先生、しるしを見せてください」(38節)と、イエスさまが神さまから遣わされた神の子、救い主であることを証明するしるし(証拠)を求めました。
この「しるし」を求めること自体は、決して間違ったことではありません。自分が信じて良いのかどうなのか、その確信が必要なのは当然です。ただ問題は、与えられた「しるし」を「しるし」として認めるかどうかは本人次第です。
実は、イエスさまはこれまで何度も律法学者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の前で、病を癒やしたり、人間の力では不可能な奇跡を行って来ました。これこそがイエスが神の子、救い主であるという「しるし」であったわけですが、律法学者と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その「しるし」を「悪霊の頭ベルゼブルの力」(24節)で行っていると非難し、神さまの働き、聖霊の働きを認めませんでした。
赦されるはずのない罪人だと考えた人たちに対して、イエスさまが罪の赦しを宣言されていることをどうしても受け入れられなかったのです。
あの者たちは、我々と同じように律法を守っていないのに、神さまに願いを聞いてもらえるなんて、罪を赦してもらえるなんて、そんなことがあっていいんですか? 我々のように、熱心に聖書を学ぶことも、祈りを口にすることもなかったのに、罪を悔い改めたのか、反省しているかも分からないのに、救われて良いのですか……?
これと同じ思いを抱いた人が、まさにヨナでした。彼は、神さまから、悪名高いニネベの町へ遣わされ、人々に悔い改めを求めるよう命じられた預言者です。「預言者が遣わされる」ということは、「神さまが、その人々を悔い改めさせ、滅びを免れさせようとしておられる」ことを意味しますが、ニネベは、イスラエルの国を滅ぼしたアッシリアの首都です。なぜ、そんな敵国の人々のところに、自分が遣わされ、悔い改めて滅びを免れるように呼びかけ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ヨナには理解できません。そこで、ヨナはニネベとは反対方向の船に乗り、使命から逃れようとします。でも、その船は途中で嵐に遭い、ヨナは海の中へと投げ込まれました。本来なら、溺れ死んでしまうところを、神さまが命じた巨大な魚に呑み込まれ、三日三晩魚の腹の中にいた後、陸地へ吐き出されました。ヨナは、神さまの命令通り、ニネベの町へと向かいます。
ヨナはニネベに到着すると、「あと四十日すれば、ニネベの都は滅びる」と叫んで回り、人々へ神の言葉を伝えていきました。すると、ニネベの人々はヨナの言葉を信じ、悔い改め、ニネベの王も「神さまが思い直して怒りを静め、滅びを免れるかもしれない」と布告を出し、人々と共に悔い改めます。
神さまはその様子を見て、宣告した災いを下すのをやめられます。ヨナは、ニネベの人たちが救われたことに対し、大きな不満を持ちました。「彼らが滅びを免れて、救われるのを見るくらいなら、生きているよりも死ぬ方がましです」とまで言い始めます。
ヨナの態度は、病人がイエスさまに癒されるのを喜べなかった律法学者や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と同じです。「我々のように、熱心に聖書を学ぶことも、掟を守ることも十分していなかったのに、たった今悔い改めて、救いを求めた人たちが、本当に赦されて良いのですか?」「彼らが救われるのを見るくらいなら、そんな救い主なんて、死なせる方がましです」と。
けれども、神さまはヨナに対し、「お前は怒るが、それは正しいことか」(ヨナ4:4)と問いかけ、「どうしてわたしが、この大いなる都ニネベを惜しまずにいられるだろうか」(ヨナ4:11)と語りかけます。イエスさまはファリサイ派の人々に「医者を必要とするのは、丈夫な人ではなく病人である」(マタイ9:12)、「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くためである」(マタイ9:13)と呼びかけ、嫌われていた徴税人や、罪人と呼ばれる人たちとも、同じ食卓に着かれました。
イエスさまは、39節で「預言者ヨナのしるしのほかには、しるしは与えられない」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ヨナの時代に、ニネベの人たちに与えられた「しるし」とは何だったのでしょうか。実は何だかよく分からないのです。なぜなら、ヨナはニネベの人々に「あと四十日すれば、ニネベの都は滅びる」と言っただけで、本当にそうなるという証拠も、神さまがそう言っているという証拠も見せてないからです。
それにもかかわらず、ニネベの人々はヨナの言うことを聞いて、悔い改め、自分たちの罪を赦してもらえるように祈り始めたのです。ニネベの人たちはヨナの言葉を信じ、悔い改めたところで救われる保証もないのに、神さまの言葉として受け止め、悔い改めたのです。
「預言者ヨナのしるし」というのは、何の奇跡も、何のしるしも与えられなかった、悪名高いニネベの人たちが、その信仰を受け入れられ、神さまに救ってもらえたように、分かりやすい奇跡を与えられない私たちも、救いにあずかる者として、受け入れ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の信仰は、「しるし」によって得られるものではなく、神さまの御言葉を信じるところから始まるのです。私たちも本当に救われるという証拠が与えられ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それでも、ニネベの人たちと同じように、神さまの言葉を聞いて、イエスさまが神の子だと信じ、やがて来たる神の国に迎えられるまで、悔い改めて、新しい生き方をしようと決断したのです。
なかなか病気が癒やされず、事態の悪化に苦しめられ、神さまに救ってもらえる保証など何一つ与えられてない……それでも、信じないではいられない……教えを聞かずにはいられない……そのような者へ、イエスさまは「ここに、ヨナにまさるものがある」と言われます。しるしが与えられないことは、救いのない証拠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しるしがないのに信じるあなたへ、イエスさまは希望を語っておられるのです。
皆さん、もう一度申し上げますが、信仰とは、確かな「しるし」があるから信じるの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の言葉を聞いて、これに懸けて出かけるかどうか、神さまを信じる旅をするかどうかに懸かっているのです。そうすれば必ず「しるし」は見つかります。神さまがあなたと確かに共にいてくださる“インマヌエル”のしるしがきっと見つかります。
どうか、信じない者ではなく、信じる者とされますよう、お祈りいたします。
【2025년 7월 20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마태복음 12장 38~42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38절)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임을 증명하는 표적(증거)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무엇을 믿고 따를 것인지 확신을 갖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다만 문제는 이미 주어진 표적을 보고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그들의 태도에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병자를 고치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을 행해 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표적”이었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표적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24절)으로 행해졌다고 비난하며, 하나님과 성령의 사역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율법을 지킨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적도 없는데, 회개한 건지도 모르는데 그런 이들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 게 맞는 일 입니까? ”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바로 요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악명 높은 니느웨로 보내져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보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회개시켜 멸망을 면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을 뜻하는데,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왜 그런 적국 사람들에게 보내져 회개하고 멸망을 면하도록 호소해야 하는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타고 사명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배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요나는 결국 바다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해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육지로 토해지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니느웨로 향합니다.
요나는 니느위에 도착하자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요나 3:4) 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갔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믿고 회개했습니다. 왕도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요나 3:9)라고 선포하여 사람들과 함께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선고한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멸망을 면하고 구원받는 것을 볼 바에야 살아 있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 라고까지 말하기 시작합니다.
요나의 이 태도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기뻐하지 못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우리처럼 열심히 성경을 배우지도, 율법을 지키는 것도 충분히 하지 않았는데, 방금 회개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다니…그런 사람들을 구원하는 예수라면, 그런 구세주는 차라리 없는 게 낫습니다’ 라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요나 4:4)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요나 4:1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태복음 9:12),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태복음 9:13)라고 말씀하셨고, 미움받던 세리나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도 함께 식사를 하시며 그들을 구원의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9절에서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시대에 니느웨 사람들에게 주어진 “표적”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딱히 어떤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고 말했을 뿐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나, 실제로 무너질 것이라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회개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의 보장도 없었지만, 그저 말씀만 듣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은 기적이 눈 앞에 없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행동하면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역시 확실한 표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신앙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표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정말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증거가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니느웨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으며 이윽고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할 때까지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자고 결단한 것입니다.
좀처럼 병이 치유되지 않고, 고난이 지속될 때에도, 우리는 떨칠 수 없는 믿음으로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표적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구원이 없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표적이 없는데도 믿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희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믿음이란 확실한 표적이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나아갈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표적”은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분명히 함께하신다는 증거, “임마누엘”의 표적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믿음 없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