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ゴ

メイン画像

説 教ページ

2025年06月2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6月2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시편) 118編 21~24節
〇讃    頌    讃頌歌 10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31 (詩編68編 )
〇讃    頌    讃頌歌 531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2章 15~32節
〇説   教    「安息日の主 (안식일의 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38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6月 2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国の到来」」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2章 15~32節


 先週の聖書箇所では、安息日について、ファリサイ派の人々との間で論争となり、イエスさまは安息日が真の意味で神さまのもとなるように、神さまの憐れみを思い起こし、神さまの恵みとして、安息日に善いことを行うことは当然だとの見解を示されました。しかし、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納得することなく、「どのようにしてイエスを殺そうか」と相談し始めました。
 そんなファリサイ派の人々の殺意を、イエスさまは感じ取り、その場を立ち去りましたが、依然として、大勢の群衆が従ってきました。イエスさまは、その行かれた所々で癒やしを続けられるのですが、イエスさまは、自分のことを人々に知らせないようにと彼らを戒められるのです。


 そして、17節で「それは預言者イザヤを通して言われていたことが実現するためであった」と理由を述べ、18節から21節でイザヤ書42章1~4節の言葉を少し変えて引用しております。その始めの言葉が18節「見よ、わたしの選んだ僕。わたしの心に適った愛する者」とあり、イエスさまが「神の僕として世に遣わされたイエス・キリスト」だと証言しています。


 しかし、このことを本当の意味で理解した人はいませんでした。イエスさまによって、多くの人々が病を癒され、「この人はダビデの子ではないだろうか」と熱狂しましたが、イエスさまの言葉を信じて、罪を悔い改め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十字架を目指して歩まれるイエスさまの道行は、弟子たちと群衆とに取り囲まれながらも、誰にも理解されない神さまの御業を孤独に果たすためにささげられた、神さまの僕の密かな献身であったのです。


 ファリサイ派の殺意を感じ取って身を引かれたのも、癒した人々の口を厳しく封じたのも、それがイエスさまに定められた献身の道であったからです。「彼は争わず、叫ばず、その声を聞く者は大通りにいない」(19節)。イエスさまは、ひたすら神さまの御旨を果たすために御自分をささげておられました。


 その神さまの御旨とは、18節と20節にある「正義」です。韓国語の聖書では「裁き」と訳されています。聖書では「正義」と「裁き」は別のことではありません。「裁き」とは神さまが憐れみによって力のない者を救うために世の不正を決定的に処断することです。イエスさまの働きは、その神さまの「正義」と「裁き」を世界にもたらすためのものでした。その証しが癒しの出来事であったのです。


 20節ではこう言われています。「彼は傷ついた葦を折らず、くすぶる灯心を消さない」(20節)。
 水際に生えた葦も傷ついては役に立ちませんから、人はそれをへし折って脇へやります。消えかかった灯心は煙を出すばかりで役に立ちませんから、人はそれをさっさと揉み消します。しかし、神さまはそのように弱った者たちを見捨てることをせず、イエスさまを送って正義を行わせます。その正義は、聖霊の力によってなされました。


 この聖霊の御業を、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悪霊の頭ベルゼブルの力」と言って危険なものと見做しました。これが22節以下の「ベルゼベル論争」と呼ばれるものです。論争と言っても、イエスさまは論争をし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の教えはファリサイ派の教えと対等に議論される類のものではなく、神の国の真実を一方的に伝えるものです。
 それは、聖霊の力によって悪霊を追い出し、その癒された人の上に、神さまの正義が表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目が見えずモノも言えない、暗闇と沈黙の世界からの解放はまさに象徴的に、サタンの支配からの解放を表しています。


 しかし、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あれはベルゼブルの仕業だ」と、「悪霊の力で魔術を行っている」と、イエスさまを受け入れません。むしろ、魔術を行う者として処刑しょうとします。
 これに対し、25節以下で、イエスさまは反論されておりますが、ここに合理的な決着を求めてい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がおっしゃりたいことは、28節以下の内容です。「わたしが神の霊で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のであれば、神の国はあなたたちのところに来ているのだ」(28節)。


 イエスさまは「神の国が来ている」と仰っております。神の国が実現する時には、イザヤ書が語っているように聖霊の力によって、目の見えない人が見えるようになり、口が利けない人が言葉を話すようになる」わけですが、それが今、現に起こっていると言うのです。だから、「神の国が来ている」と。
 神の国が来ているというのは、終末が来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ね。終末というのは、神さまの裁きの時です。それに対する備えはしているのかと、イエスさまは問うておられ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につまらない中傷を浴びせるファリサイ派の人々ですが、彼らは自分の内にある深刻な問題に気付いておりません。「あれは悪霊の力で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との軽率な中傷は、単に人を貶める言葉では済みません。「人が犯す罪や冒涜はどんなものでも赦される」(31節)とイエスさまは言われます。人間の弱さをご存じである神さまは、赦しを与える憐れみの神さまです。特に、主の十字架に示される神さまの赦しは、人間のあらゆる罪に適用されますから、どのような罪であっても、その重さを受け止めて神さまに赦しを乞うならば、人は御子の十字架によって赦していただけます。


 しかし、「霊に対する冒涜は赦され」ません(31節)。「聖霊に言い逆らう者は、この世でも後の世でも赦されることがない」(32節)のです。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イエスさまの内で働かれる聖霊を冒瀆してしまいました。聖霊に対して、悪霊だと言ったわけです。そして、聖霊を送られた神さまを、ベルゼブルだと言ったのです。彼らは自分が発した言葉の責任を問われることになります。


 神さまの霊は、今、御言葉を聞いて、イエスさまの御業について知らされた私たちの内に働いています。この神さまの霊の働きが、実は、自分の罪が赦されるか、赦されないかを決定するものなのです。この聖霊の働きを信じるのであれば、その聖霊が私の内にも働いて、悪霊から守ってくださると信じることが出来ます。私たちの内には、私たち自身を苦しめる悪意が生じます。それは、嫉妬であったり、人を蔑む思いであったり、冷酷であったりします。そのような悪意こそが悪霊の働きでありますが、私たちがイエスさまを信じ、クリスチャンになったとしても、この悪霊の働きを完全に防げる訳で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私たちはイエスさまを信じますと言いながら、簡単にイエスさまに敵対する者となってしまうのです。
 そうならないように、自分自身を滅ぼしてしまわないように、十字架で死んで復活されたキリストが、聖霊を私たちに送って、私たちを悪霊の支配から解き放ってくれるよう祈り求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いくら憐れみ深い神さまだとしても、私たちがじっと待っていてはいけません。それではなく、憐れみ深い主イエスさまに目を留めることからすべては変わって行きます。こんなに罪深い私のような者のところに、「神の国は来た」と教えてくださったイエスさまが来てくださっている。このことに私たちの目が開かれたときに、私たちの問題はすでにほとんど解決してしまっているのです。
 皆さん、今日の御言葉28節を心に刻みましょう。「しかし、わたしが神の霊で悪霊を追い出しているのであれば、神の国はあなたたちのところに来ているのだ。」
 そうです。神の国はもう私たちのところに来ているのです。安心して新しい日々を歩み出しましょう。


【2025년 6월 29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 나라의 도래” 
              마태복음 12장 15~32절


 지난주 성경 말씀에서는 안식일을 둘러싸고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시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로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입장을 밝히셨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 수 있을까” 하고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살의를 느끼시고 그 자리를 떠나시지만, 여전히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병든 이들을 고쳐 주셨지만, 그들에게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며, 18절부터 211절까지 이사야 42장 1~4절의 말씀을 약간 바꾸어 인용하십니다. 그 시작이 18절의 “보라 내가 택한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종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참된 의미에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침 받고는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겠는가?” 하며 열광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죄를 회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여정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채 예수님 혼자서 감당하시는 하나님의 종의 은밀한 헌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살의를 느끼시고 물러나신 것도, 병든 이들의 입을 막으신 것도, 모두 그 헌신의 길을 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19절).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곧 18절과 20절에 나오는 “정의”는 한국어 성경에서는 “심판”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정의”와 “심판”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심판”이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힘없는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의 불의를 단호히 끊어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이 세상에 실현하는 것이었고, 그 증거가 바로 치유의 역사였습니다.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20절).
  물가에 자라는 갈대는 한번 상하면 쓸모가 없어 꺾어 버립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연기만 날 뿐 도움이 되지 않기에 금세 비벼 꺼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약한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보내시어 정의를 실현케 하십니다. 그 정의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성령의 사역을 바리새인들은 “악령의 우두머리, 바알세불의 힘”이라고 하며 위험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22절 이하의 “바알세불 논쟁”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논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일방적으로 선포하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을 쫓아낸 것은, 치유받은 사람 위에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던 사람이 해방된 것은, 어둠과 침묵의 세계, 곧 사탄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가 악령의 힘으로 마술을 부리는 자다”라고 비난하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마술사로 몰아 처형하려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5절 이하에서 반론하시지만, 단순히 이성적인 논리로 결론을 내리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정말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은 28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때는, 이사야가 말하듯 성령의 능력으로 눈먼 자가 보게 되고, 말 못하는 자가 말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지금 현실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은 곧 종말이 다가왔다는 의미입니다.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심판의 때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험담을 퍼붓는 바리새인들이지만, 그들은 자기 내면의 심각한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악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는다”는 경솔한 중상은 단순한 비난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받되”(31절).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용서는, 어떤 죄든 그 무게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면, 독생자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반드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합니다”(31절).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2절)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모독하였습니다. 성령을 악령이라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을 바알세불이라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사역을 알게 된 우리 안에서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 성령의 역사가 바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지 여부를 결정짓습니다. 우리가 이 성령의 사역을 믿는다면, 성령께서 내 안에도 역사하시며, 나를 악령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신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악한 마음이 자주 생깁니다. 그것은 질투이기도 하고, 남을 멸시하는 마음이기도 하며, 냉혹함이기도 합니다. 이런 악한 마음이 곧 악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도, 이 악한 마음의 작용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어느새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악령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시도록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고 구해야 합니다.
  아무리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 해도, 우리가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비로우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모든 변화는 시작됩니다. 이렇게 죄 많은 나와 같은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소식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문제는 이미 대부분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 가운데 28절을 마음에 깊이 새깁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안심하고 새로운 날들을 믿음 안에서 힘차게 걸어가면 됩니다.

 

カテゴリー:

投稿日:2025年06月29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