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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06月22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6月22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18編 21~24節
〇讃    頌    讃頌歌 8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29 (詩編65編 )
〇讃    頌    讃頌歌 531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2章 1~14節
〇説   教    「安息日の主 (안식일의 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38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6月 2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安息日の主」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2章 1~14節


 先週の聖書箇所では、「疲れた者、重荷を負う者」たちの休み、安息について語られていましたが、今日の聖書箇所では、その休息の日である「安息日」のことが話題となっています。


 この安息日にイエスさまの行動が問題となりました。ある意味それは決定的な問題でした。14節に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が「どのようにしてイエスを殺そうかと相談した」とありますが、これがイエスさまを十字架に架ける理由になったのです。


 安息日厳守の信仰は、旧約のイスラエルにとって命がけのものでした。安息日の規定は出エジプト記20章にある十戒の中で、また、出エジプト記23章にある「契約の書」の中に規定されています。そして、31章12節以下では、さらに入念な形で記されており、そこでは安息日の掟を破る者は必ず死刑に処せられると二度も繰り返されています。
 安息日遵守は、神さまとイスラエルとの間で結ばれた「永遠の契約」のしるしであって、信仰の証しがそこにかけられていたわけです。ですから、安息日の戒律を破るように見えるイエスさまを、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殺そうと考えるのも理解できます。


 では、イエスさまはどのような律法違反を犯したのでしょうか。
 それは、安息日にお腹を空かせた弟子たちが麦の穂を摘んで食べたということが原因でした。しかし、イエスさまは、安息日違反の訴えに対し、旧約聖書の事例をもとに反論されています。


 まず、一つ目は、サムエル記上21章に記された出来事です。サウルのもとから逃れたダビデはノブという町の祭司アヒメレクを訪ねました。必要なものをそこで調達するためでしたが、ダビデはアヒメレクから、落ち合う仲間たちのためにパンを求めました。そこには一般の者が手を出してはならない供え物のパン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律法によれば、供え物のパンを食べることが許されているのは聖所で奉仕する祭司たちだけでした。けれども、祭司アヒメレクは聖所から取り下げたパンをダビデに手渡しました。ダビデでさえ時に律法に反することをして、それが咎められてはいない、という事例がここにあります。


 そして、5節に「安息日に神殿にいる祭司は、安息日の掟を破っても罪ならない」とありますが、これについては民数記28章のことを触れながら、神殿にいる祭司たちには安息日にささげものをささげる奉仕が命じられていて、安息日に仕事を休まなくてはならないという掟には縛られていません。
 ただ、そこで問題になるのが、祭司ではないイエスさまの弟子たちと何の関連があるのかと言うことですが、弟子たちは神さまの働きのために世に遣わされたイエスさまと共に旅をしているとの理由で、神殿で働く祭司たちと同等の立場にあるとイエスさまは主張しておられ、さらに6節で「神殿よりも偉大なものがここにある」と言われています。


 それから7節で引用されている言葉は、ホセア書6章6節にある御言葉です。「わたしが求めるのは憐れみであって、いけにえではない。」
 マタイによる福音書では、既に9章13節でも引用さ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が徴税人や罪人たちと食卓を囲むのを快く思わなかったファリサイ派の人々に向かって、「わたしは罪人たちを招くために来た」と仰った時に、同じ聖句が引用されました。預言者ホセアはこの言葉を、神の言葉を真剣に聞いて義を行うことをせず、形ばかり豪華になった礼拝をささげて自己満足をしていた、当時のイスラエルに向けて告げました。神さまが人に求めているものは、神殿ではなく人間自身です。神さまは人間の犠牲によって御自身を喜ばすお方ではありません。そのことを聖書から正しく知るならば、律法をたてにして「罪もない人たちをとがめる」ことはしないはずです。


 そして、イエスさまは「人の子は安息日の主なのである」(8節)と言われます。
 安息日は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人間が罪の支配から解放される日です。神さまの憐れみが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人に注がれる日です。イエスさまは、安息日の主として、ファリサイ派の人々が自ら科していた重い軛をこうして取り外されます。安息日の意義が無効にされた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すが、安息日が安息日らしく、神さまのものとなるように、すなわち、神さまの御旨に従って人に憐れみが注がれる日となるように、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に「無罪」を宣告されたのです。


 このことをもっと具体的に示されたのが、9節以下の出来事です。イエスさまは会堂にお入りになり、そこにいた片手の萎えた人を癒やされました。厳格な安息日遵守の立場では、安息日に病気を治すことも禁じられていました。その日に医者の処へ行っても、明日にしなさいと言われてしまいます。萎えた手を癒すのは、緊急の必要ではなかったと思います。次の日でも十分だったはずです。けれども、イエスさまは敢えてそれを安息日の会堂で行われました。


 その時に、イエスさまは「自分がもっているたった一匹の羊が穴に落ちたら、安息日だから放っておくなんてことは誰もしないでしょう」と、譬えをもって反論しています。羊ですらそうなのだから、まして人間だったら、助けないなどということはありえない、とイエスさまは言われているのです。安息日に善いことをするのは合法だ、と。


 イエスさまは安息日そのものをここで廃棄するとは仰っていません。むしろ、その本来の意義をここで教えておられます。これは安息日だけに関わるものではなく、律法全体に関わることです。
 かつて旧約のイスラエルの人々はエジプトで奴隷でした。休むことなく働くことが義務づけられ、人間としての尊厳も奪われて、虫けらのように死ぬばかりでした。けれども、主なる神さまがモーセを送って彼らを自由へと解放してくださって、イスラエルは尊厳ある国民とされました。この力のない民が、神さまの祝福を得て生きながらえるために、神はモーセを通じて律法をくださいました。神の知恵に満ちたこの律法が、イスラエルが神さまと共に生きて祝福を得るための必要であったのです。こうして、律法には本来、神さまの憐れみが示されています。安息日の規定がことさら厳格なのも、人が神さまのもとで、休息を得る、すなわち救われるためであったのです。


 それなのに、人は律法に現わされている神さまの憐れみを忘れてしまいます。イエス・キリストは、生ける神の子として世に来られて、律法の心を御自分の働きによって教えてくださいました。その心とは、罪ある人間を赦して、御自分のもとへ立ち返らせる、神さまの憐れみ、愛です。


 安息日の規定にしろ、律法の他の条項にしろ、それを杓子定規に共同体の生活に当てはめるのは間違いです。時代が変わり、人が変わるに従って、聖書が私たちに与える指針も新しくなります。聖書を正しく読む手立ては、主イエス・キリストに現わされた神さまの憐れみを信じて、聖霊がその御言葉を正しく生活に適用させてくださることを祈り求めながら、為すべきことと避けるべきことをその都度聞き分けることです。


 私たちは、日曜日を安息日、主の日として礼拝を守っております。神さまが、この安息日に求められるのは、私たちが憐れみに生きること、愛に生きることなのです。
 そして、私たちが具体的に憐れみと愛に生きるためには、もっと神さまの憐れみと愛を知る必要があります。だから、主はこう言われたのです。「疲れた者、重荷を負う者は、だれでも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休ませてあげよう」(11:28)。
 私たちは、主の日に神さまのもとに来て、「神さまの憐れみを受けている」「神さまの愛を受けている」ということをもっと知り、喜び、感謝し、この憐れみ、この愛に生きていこうと決心して歩みだしていく、それが礼拝なのです。


【2025년 6월 22일 주일예배(요약판)】

      “안식일의 주”   
              마태복음 12장 1~14절


  지난 주의 성경 말씀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쉼과 안식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오늘의 성서 본문에서는 그 쉼의 날인 “안식일”이 주제입니다.
  이 안식일에 예수님의 행동이 문제로 제기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결정적인 문제가 되었는데, 14절에는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안식일 엄수에 대한 신앙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에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에, 또한 출애굽기 23장에 있는 ‘계약서’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1장 12절 이하에는 더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곳에서는 안식일 계명을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두 번이나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언약’의 징표이며, 신앙의 증거가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 계명을 어긴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이 죽이려 한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율법 위반을 저지르신 것일까요?
  그것은 안식일에 배가 고팠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따먹은 일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위반이라는 고발에 대해 구약 성경의 예를 들어 반론하십니다.


  먼저 첫 번째는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던 다윗은 놉이라는 마을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습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은 동료들을 위한 음식을 요구했지만, 그곳에는 일반인이 손대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떡)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 떡은 성소에서 섬기는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사장 아히멜렉은 성소에서 내려온 그 떡을 다윗에게 건넸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조차도 율법에 어긋나는 일을 했지만 비난받지 않았다는 예로 제시된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는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다”고 나옵니다. 이는 민수기 28장을 언급한 것으로,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에게는 안식일에도 제사를 드리는 일이 명령되어 있었으며, ‘안식일에는 일을 쉬어야 한다’는 계명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제사장이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과 이 일이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상에 보내진 예수님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7절에서 인용된 말씀은 호세아 6장 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이 말씀은 마태복음 9장 13절에서도 이미 한 번 인용되었습니다. 그때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나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면서 같은 성구를 인용하셨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지도 않고, 의를 행하지도 않으면서, 형식만 갖춘 화려한 예배에 만족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성전이 아니라 인간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제사로 인해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 바르게 알았다면, 율법을 방패 삼아 “죄 없는 사람을 정죄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8절)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에게 흘러 들어오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바리새인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있던 무거운 멍에를 이렇게 벗겨내십니다. 안식일의 의미가 폐기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본래의 의미대로 하나님께 속한 날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에게 긍휼이 흘러가는 날이 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죄’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 9절 이하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고, 그곳에 있던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을 엄격히 지키는 입장에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병원에 가도 의사는 내일 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병을 고치는 일은 긴급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음 날 해도 충분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감히 그것을 안식일의 회당에서 행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비유를 들어 반론하십니다. 양조차도 그렇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말로,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안식일 자체를 폐기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본래의 의미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안식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전체에 관한 말씀입니다.
  한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쉼 없이 일하는 것이 당연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빼앗긴 채 벌레처럼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셨고, 이스라엘은 존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힘없는 백성이 하나님의 복을 입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 담긴 이 율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며 복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율법에는 본래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규정이 유난히 엄격한 것도,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고, 곧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긍휼을 잊어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셔서, 그 일하심을 통해 율법의 본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본질이란, 죄 있는 인간을 용서하시고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안식일의 규정이든, 율법의 다른 조항이든, 그것을 무조건 공동체의 삶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바뀌는 것처럼,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 또한 새롭게 다가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우리의 삶에 올바르게 적용시켜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때그때 해야 할 일과 피해야 할 일을 분별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안식일, 주님의 날로 삼아 예배를 지킵니다. 하나님께서 이 안식일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긍휼에 따라 살아가는 것,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긍휼과 사랑 안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우리는 주님의 날에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닫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이 긍휼과 사랑 속에서 살아가기로 다짐하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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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06月22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