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06月15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6月15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29章 13~14節
〇讃 頌 讃頌歌 43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376 (三位一体 )
〇讃 頌 讃頌歌 198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1章 25~30節
〇説 教 「主の軛を負って
(주님의 멍에흫 메고)」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87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6月 1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主の軛を負って」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1章 25~30節
マタイによる福音書11章には、これまで読んで来ましたように、イスラエルが自分たちのために来られたメシア(救い主)を受け入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が記されていました。
11章20~24節では、神の民の特権を持ったイスラエル人の住むガリラヤの町々に対して、彼らがイエスのなさった奇跡を、「救い主キリストのなさったこと」として認めなかったので、イエスさまはその悔い改めない町々を叱り、災いを宣告されました。
今日の聖書箇所は、その話に続くものです。イエスさまは、ここで「天地の主である父よ、あなたをほめたたえます」(25節)と、唐突に父なる神さまを讃美し始めます。文脈からすると、おかしな感じが致します。悔い改めない人々への非難と嘆きから、いきなり父なる神さまへの讃美に変わるのは、余りにも唐突すぎます。
それは恐らく悔い改めないコラジン、ベトサイダ、カファルナウムの人々の中にも悔い改めた人がいたからなのでしょう。わずかながらも神さまの御言葉に耳を傾け、自分を見つめ直した人がいました。「幼子」(25節)のように信じた人がいたのです。それはイエスさまにとって、この上もない喜びであり、父なる神さまをほめたたえる出来事だっ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は、「これらのことを知恵ある者や賢い者には隠して、幼子のような者にお示しになりました」(25節)と語られました。「知恵ある者」「賢い者」とは、自分には知恵があると思って誇っている者、自分は賢いと思って誇っている者たちです。そういう人にとっては、イエスさまの語られる言葉というのは、愚かなことのように思えますし、世の荒波を生き抜いていくためには、何の得にもならないように思えます。そうすると、神さまが、その人たちに福音を隠された、というよりも、自分自身が神さまの言葉に対して、心を閉ざしているために、福音が分からなくなっている、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一方、「幼子のような者」とは、乳飲み子のように親に全面的に頼らなければ生きていけない小さな存在を意味しています。神さまに全面的に頼らなければならない生きていけないわけですから、その人は神さまの言葉を必死で聴きます。神さまの言葉を、自分を生かす命の言葉として聴くのです。
私たちは、どうでしょうか。神さまの御言葉をどのように聞いているでしょうか。乳飲み子が乳を求めるように聴くならば、御言葉が私たちに生きる力を与え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乳飲み子が親の愛を求めるように、神さまの愛を求める者に対して呼びかけております。28節です。「疲れた者、重荷を負う者は、だれでも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休ませてあげよう」(28節)。
有名な御言葉です。多くの教会でこの御言葉が掲げられています。人々を安らぎへと、救いへと招く言葉です。毎日の仕事に疲れを覚え、身近な人間関係や日常の生活に重荷を感じている人には、このイエスさまの御言葉が心に響くでしょう。
疲れや重荷は、人を弱くします。疲れや重荷を感じ、弱っているからこそ、人は本気で神さまの安らぎを求めるのだろうと思います。なぜかと言いますと、自分自身の中に、疲れや重荷を解消し、安らぎを生み出す要素がないからです。だから、自分の外に、神さまにそれを求めます。そして、それが本質的な礼拝でもあるのです。
コラジン、ベトサイダ、カファルナウムにも「疲れた者」「重荷を負う者」がいて、神さまの安らぎを求めておりました。けれども、多くの人が諦めていたのです。なぜなら、ユダヤ教の主流派であるファリサイ派や律法学者たちが、律法の掟という重荷を人々に背負わせていたからです。
ところが、主イエス・キリストは、律法という重荷を取り払ったのです。自分のような律法の掟を守れない者は、天の国に入れない、安らぎを得られないという呪縛から解き放ったのです。「律法を守ることが、天の国と安らぎの条件ではない。それは恵みによって与えられるものだ。あなたはもうそのままで父なる神さまに受け入れられ、愛されているのだ。神さまはあなたのそばに、あなたと共にいてくださるのだ。だから、天の国はもうあなたのもとに来ているのだ。」このイエスさまの呼びかけを信じて、重荷を解かれ、呪縛から解放された人、それが悔い改めた人であり、幼子のように天の国を受け入れた人です。
皆さん、私たちも主イエスさまから、「休ませてあげようと」と招かれています。そのため、私たちは感謝して、神の恵みをほめたたえるために礼拝に来ます。でも、時々疲れます。礼拝に来れない時があります。そんな時、私たちは「礼拝に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なのに・・」と考えます。それがクリスチャンにとって、新たな律法になり、重荷になり、呪縛になります。けれども、疲れて、辛くて、悲しくて、また忙し過ぎて来れないこともあります。「今日も行けなかった‥」、そう思って溜め息をつくことしか出来ないかもしれません。でも、この溜め息をつき、神さまに祈ることが、主の御許に来ることであり、弱さの中で礼拝を守ることなのです。
神さまは、溜め息をつく私たちのことを見ていてくださっています。そんな私たちに配慮してくださるのです。何と感謝なことでしょうか。
もし、新しい掟があるとしたら、それはイエスさまが負いなさいと言われる「わたしの(イエスさまの)軛」(29節)であり、「わたし(イエスさまの)荷」(30節)です。そのイエスさまの軛、イエスさまの荷、すなわち、「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ヨハネ13:34)と言われた主の教えです。これが新しい掟であり、私たちが負うべき重荷です。
イエスさまは「わたしは柔和で謙遜な者だから、わたしの軛を負い、わたしに学びなさい。そうすれば、あなたがたは安らぎを得られる。わたしの軛は負いやすく、わたしの荷は軽いからである。」(29-30節)と語っておられます。
軛とは、2頭の家畜が並んで、畑で鋤を引くために、首と首とをつなげる道具です。だから、「わたしの軛」とは、イエスさまと共に、イエスさまと並んで歩むためのものです。イエスさまと共に歩んでいく中で、自分に人生に取り巻く重荷をどのように引っ張れば良いのかを学ぶのです。
イエスさまは、ここで「わたしは柔和で謙遜な者だから」と言われていますが、自分の重荷さえも負えない罪人の私たちに対し、優しく、謙遜に仕え、支えて下さる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重荷を負うことが出来ます。重荷がなくな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に代わって重荷を負って下さるイエスさまが共におられるから、私たちはそこで休むことが出来るのです。
皆さん、今日の御言葉をどのように受け取ったでしょうか。今日の御言葉は、「休みたい」と思っている人には休み与えを、一生懸命生きていきたいと思っている人にはその道を示して下さると思います。すべての人たちが幸せになりたくて一生懸命に生きていると思います。イエスさまは、そんな私たちに「わたしのもとに来なさい」と招い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
父なる神さまの愛によって、また、イエスさまの御言葉によって、疲れを癒され、重荷を軽くされ、休みを与えられたならば、私たちも誰かと共に歩み、その疲れを少しでも癒し、重荷をわずかでも担う愛の人として歩みたいと願います。きっとそこには、互いに休める交わりが実現するでしょう。
【2025년 6월 15일 주일예배(요약판)】
“주님의 멍에를 메고”
마태복음 11장 25~30절
마태복음 11장에는 그동안 읽어왔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구세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적혀 있었습니다.
11장 20~24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 성읍들에 대하여 그들이 예수님이 하신 기적을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은 그 회개하지 않은 성읍들을 꾸짖으시며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오늘의 성경 부분은 그 이야기의 후속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 감사하나이다”(25절)라고 느닷없이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문맥상 조금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꾸중과 탄식에서 갑자기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바뀌는 것은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회개하지 않은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사람들 중에도 회개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다시 되돌아본 사람들, “어린 아이들”(25절)처럼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더없는 기쁨이자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다”(2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란 자신에게는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랑하는 자, 자신은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리석은 말인 것 같고, 세상의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가려 할 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감추어진 것처럼 느끼지만, 실은 그 사람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의 문을 닫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어린 아이 같은 사람” 이란 젖먹이처럼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작은 존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간절하게 듣고, 그것이 곧 자신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젖먹이가 젖을 찾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삶의 희망과 위안을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젖먹이가 부모의 사랑을 구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려는 자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절).
유명한 말씀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이 말씀을 걸어 놓고 사람들을 안식과 구원으로 초대합니다. 일상에서 지치고,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나 매일의 생활에서 무거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은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피곤함과 무거움을 느끼고 또 약해진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안식을 더욱 갈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 속에 수고와 무거운 짐을 풀고 편안함을 만들어내는 요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 외에 하나님께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본질적인 예배이기도 합니다.
회개하지 않았던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자들”이 있어 하나님의 편안함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주류파인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율법의 계명을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처럼 지우며 하나님의 안식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풀어내셨습니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편안함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족쇄에서 풀어내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평안의 조건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이 그대로 아버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곁에 당신과 함께 있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이미 당신에게 와 있는 것이다.’ 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믿고 무거운 짐을 풀고 속박에서 해방된 사람, 그것이 회개한 사람이며 어린 아이들처럼 하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주 예수님으로 인해 안식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위해 예배하러 옵니다. 하지만 때로는 지치기도 하고, 예배에 못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배를 가야 하는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생각이 오히려 크리스찬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율법이 되어, 무거운 짐이나 속박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지치고, 힘들고, 슬프고, 또 너무 바빠서 나올 수 없는 현실이 있습니다. ‘오늘도 또 가지 못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한숨만 쉴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한숨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어 주며, 이 한숨과 함께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한계를 느끼는 나약함 속에서 예배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숨 쉬는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런 우리를 배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만약 새로운 계명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짊어지라고 말씀하신 “나의(예수님의) 멍에”(29절)이며, “나의(예수님의) 짐”(30절)입니다. 그 예수님의 멍에, 예수님의 짐,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계명이며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29-30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멍에란 두 마리의 가축이 나란히 밭에서 쟁기를 끌기 위해 목과 목을 연결하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나의 멍에”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과 나란히 걷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우리는 인생이라는 밭에서 어떻게 무거운 짐을 감당해야 할지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시지만, 자신의 짐조차 감당할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다정하고 겸손하게 섬기고 지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거움을 질 수 있습니다. 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대신 그것을 함께 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오늘의 말씀은 쉬고 싶은 사람에게는 안식을, 열심히 살아가려 하는 사람에게는 그 길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원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 모두에게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시고 초청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말씀으로 지친 마음이 치유되고 무거움이 덜어져 참된 안식을 받았다면, 우리도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그들의 지친 마음을 조금이나마 나누고 사랑으로 함께 짐을 지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서로 위로하고 세워주며 참 안식을 함께 누리는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