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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06月01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6月1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8章 26節
〇讃    頌    讃頌歌 3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27 (詩編51編 )
〇讃    頌    讃頌歌 363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1章 20~24節
〇説   教    「主の嘆きと呻き
         (주님의 탄식과 신음)」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39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6月 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主の嘆きと呻き」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1章 20~24節


 イエスさまは、数多くの奇跡を行ったにもかかわらず、それに応える悔い改めを行わなかった町々に対し、お叱りになりました。
 21節です。「コラジン、お前は不幸だ。ベトサイダ、お前は不幸だ。お前たちのところで行われた奇跡が、ティルスやシドンで行われていれば、これらの町はとうの昔に粗布をまとい、灰をかぶって悔い改めたにちがいない。しかし、言っておく。裁きの日にはティルスやシドンの方が、お前たちよりまだ軽い罰で済む。また、カファルナウム、お前は、/天にまで上げられるとでも思っているのか。陰府にまで落とされるのだ。お前のところでなされた奇跡が、ソドムで行われていれば、あの町は今日まで無事だったにちがいない。しかし、言っておく。裁きの日にはソドムの地の方が、お前よりまだ軽い罰で済むのである。」(21-24節)


 イエスさまは、ここで悔い改めないイスラエルの町や人々に対し、裁きの宣言をしているのではなく、「どうして、悔い改めないのか、どうして神さまの愛を受け入れようとしないのか」と嘆いておられるのです。このままだったら旧約時代に神さまの裁きを受けた町以上に裁きを受けると、イエスさまは呻いておられるのです。
 ティルスという町はイザヤ書23章で、シドンという町はエゼキエル書26章から28章で、それぞれ異教に飲み込まれてしまっていることを非難されています。また、ソドムという町は創世記19章で、神の前に正しい人がいない町とされています。いずれの町も神さまから離れてしまった、悪く酷い例としてここであげられています。それが今日の聖書箇所では、コラジンとベトサイダ、そしてカファルナウムがそれ以上の裁きを受けるとイエスさまは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


 しかし、ここで挙げられている三つの町は、イエスさまの活動の拠点となった町です。また、イエスさまの活動に対し、特に反発することがあ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ティルスやシドン、ソドムより悪い町というのは、言い過ぎのような気が致します。では、イエスさまはここで何が言いたかったのでしょうか。


 先週の聖書箇所である15節から17節にこうありました。「耳のある者は聞きなさい。今の時代を何にたとえたらよいか。広場に座って、ほかの者にこう呼びかけている子供たちに似ている。『笛を吹いたのに、/踊ってくれなかった。葬式の歌をうたったのに、/悲しんでくれなかった。』」(11:15-17)


 ここには当時の子どもたちの遊びが例に挙げられていて、「結婚式ごっこ」「葬式ごっこ」と思われます。「笛を吹いたのに」とは、結婚式ごっこの始まりの合図です。「葬式の歌ったのに」というのも葬式ごっこの始まりを指しますが、誰もその呼びかけに応じず、「踊ってくれなかった」「悲しんでく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これは、洗礼者ヨハネの呼びかけに対し「あれは悪霊に取りつかれている」とあしらい、イエスさまの呼びかけに対しても「見ろ、大食漢で大酒飲みだ。徴税人や罪人の仲間だ」と切り捨ててしまう当時のユダヤ社会、宗教的価値観に対する鋭い批判であるのです。
 ですから、コラジンやベトサイダとカファルナウムという三つの町は、個別の非難ではなく、当時の状況の危機を理解出来ない人々の代表として語られ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当時のユダヤ社会や宗教的価値観というのは、ファリサイ派の人々に見られるように、律法を守るか守らないかということを基準に人の存在価値が決められ、自分の存在価値を高めるために他の人との比較がなされていました。神殿においてもこのような祈りが献げられておりました。ルカによる福音書18章11節です。「ファリサイ派の人は立って、心の中でこのように祈った。『神様、わたしは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通を犯す者でなく、また、この徴税人のような者でも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わたしは週に二度断食し、全収入の十分の一を献げています。』」(ルカ18:11-12)


 神さまの前で自分を省みるのではなく、人との比較、自分よりより弱い者との比較で、自分の優位性を自慢し、それが当たり前、それが天の国に行ける道だと、平気で信じているそんな社会に対し、イエスさまは警告しているのです。罪深い町で有名なあのティルスやシドン、ソドムの方がまだましだ、と。


 皆さん、どうでしょうか。私たちは自分には罪はなく、正しい人間であるとは、考えないかもしれません。それでも、あの人よりは、私の方が罪深くない。そういうふうに考えてしまうようなことはないでしょうか。そして、自分の罪深さを忘れようとします。
 ヨハネの手紙一の1章8~10節に、このような御言葉があります。「自分に罪がないと言うなら、自らを欺いており、真理はわたしたちの内にありません。自分の罪を公に言い表すなら、神は真実で正しい方ですから、罪を赦し、あらゆる不義からわたしたちを清めてくださいます。罪を犯したことがないと言うなら、それは神を偽り者とすることであり、神の言葉はわたしたちの内にありません。」(Ⅰヨハネ1:8-10)


 自分には罪がない。自分は罪を犯したことがない。それは、自分を欺いていることであり、神さまを偽り者とすることなのです。自分を欺く。それは、自分には罪があるのに、罪がない、と噓をついているということだけでなく。そもそも自分の罪に気づいていないのです。なぜ、気づいていないのか、と言いますと、神さまの前に立つことをしないからです。神さまを忘れ、無視し、人との間だけで生きている。先ほどもお話ししたように、人と比べて、自分の方がましだとか、考える。そうすると、私たちは、自分の罪が分からなくな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コラジン、ベトサイダ、お前は不幸だ。」「カファルナウム、お前は・・・陰府にまで落とされる」と言われました。この「不幸だ」という言葉は、呪いの言葉ではなく、イエスさまの嘆きの言葉、呻きの言葉なのです。ですから、イエスさまは悔い改めない、罪を罪とも認めない町や人々のために嘆いておられる、呻いておられるのです。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8章26節でパウロがこのように記しています。「同様に、“霊”も弱いわたし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ます。わたしたちはどう祈るべきかを知りませんが、“霊”自らが、言葉に表せないうめきをもって執り成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ローマ8:26)
 ここに出てくる「“霊”」というのは、神さまの霊、聖霊のことです。来週は聖霊降臨日ですが、この聖霊が呻くと、神さまの呻きが語られています。
 「弱いわたしたち」。自分の罪に気づくこともできず、自分の罪を認めることもできない弱い私たち。そういう私たちは、どう祈るべきか分からないのです。しかし、そういう私たちのために、聖霊自ら、神さま自ら、言葉に表せない呻きをもって執り成してくださり、私たちのために祈ってくださるというのです。


 神さま自ら執り成してくださる。私たちは、イエスさまの執り成しの祈りを知っております。「父よ、彼らをお赦しください。自分が何をしているのか知らないのです」(ルカ23:
34)。
 自分が何をしているのか知らない。自分の罪を知らない、自分が罪人であることを知らない。そういう私たちのために、主イエスさまは十字架におかかりになりました。私たちは、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おかかりになったおかげで、罪から救われ、神さまの赦しに生きる者とされました。
  主がこの私のために、嘆き、呻き、執り成してくださった。この救いの恵みをいつまでも忘れないでいたいと願います。


【2025년 6월 1일 주일예배(요약판)】

    “주님의 탄식과 신음”  
              마태복음 11장 20~24절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 기적에 반응하여 회개하지 않은 여러 도시들에 대하여 책망하셨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21-24절).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도시들과 사람들에게 단순히 심판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왜 회개하지 않는가, 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하고 깊이 탄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모습대로라면,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들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신음하며 애통해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23장에서 두로는, 에스겔 26장부터 28장까지에서 시돈은, 각각 우상숭배에 물들어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도시로 나옵니다. 또한 창세기 19장에서는 소돔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죄악으로 가득 찬 도시로 묘사됩니다. 이처럼 세 도시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서 완전히 멀어진 악하고 부패한 도시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이 이들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거나 적대한 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이 도시들이 두로, 시돈, 소돔보다 더 나쁘다고까지 하시는 것은 과한 표현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여기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걸까요?


  지난주 본문인 마태복음 11장 15절~1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1:15-17).


  여기에는 당시 아이들이 놀던 놀이인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가 비유로 등장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불러도 울지 않는다는 것은, 함께 어울릴 줄 모르는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외침을 “그는 귀신들렸다”라며 무시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도 “보아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라고 멸시한 당시 유대 사회와 종교적 가치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입니다.
  따라서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세 도시는 개별적인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당시의 영적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유대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예로서 언급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의 유대 사회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율법을 지키는 여부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였고,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1~12절에 보면, 성전에서 드린 바리새인의 기도가 소개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대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그런 사회, 그것이 마치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고 착각하던 사회에 대해 예수님은 경고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죄악으로 이름난 두로와 시돈, 소돔보다도 그들의 상태가 더 심각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죄가 없고, 의로운 사람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덜 죄인이다”라고 은근히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하며, 자기 죄의 무게를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한일서 1장 8~1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일입니다. 자신을 속인다는 것은 단지 거짓말하는 것을 넘어, 애초에 자신의 죄에 대해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죄를 자각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무시하며, 사람들 사이에서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비교하며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죄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벳새다야”, “가버나움아…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저주가 아니라 탄식이며, 깊은 신음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도시들과 사람들을 향해 탄식하고 계시고, 신음하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여기서 말하는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이요, 다음 주일에 기념하게 될 성령강림의 주인공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신음을 통해 하나님의 신음이 전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연약한 우리들”, 곧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죄를 인정하지도 못하는 우리. 그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위해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께서 친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해주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해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우리들. 그런 우리를 위해 주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은혜로 인해 죄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용서 아래 살아가게 된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 나 하나를 위해 탄식하시고, 신음하시며, 간구해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고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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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06月01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