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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05月25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5月25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ペトロの手紙二(베드로후서) 3章 8~9節
〇讃    頌    讃頌歌 36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25 (詩編47編 )
〇讃    頌    讃頌歌 286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1章 1~19節
〇説   教    「天の国で最も小さい者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10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5月 2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天の国で最も小さな者」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1章 1~19節


 今日の聖書箇所は、イエスさまが本当に救い主なのかという疑いが生じたことについて記さ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は6節で「わたしにつまずかない人は幸いである」と言われましたが、イエスさまにつまずきかけていた人物がおりました。それは以外にもバプテスマのヨハネでした。ヨハネは、「イエスこそ待ち望んでいたキリスト(救い主)です」と信じ、それを表明していました。しかし、その確信が陰り、疑いの雲がかかってしまいました。かつて自分の弟子たちには、あのお方こそ待ち望んでいた救い主ですと教えていました(ヨハネ1:29-30)。しかし、今、その弟子たちをキリストのもとへと遣わし、「来るべき方は、あなたでしょうか。それとも、ほかの方を待た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3節)と、すなわち「あなたは本当にキリストなのでしょうか」と尋ねさせています。


 洗礼者のヨハネは、イエスさまがどのようなお方なのか知らなか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他の誰よりも知っておりました。しかし、イエスさまの言動は、自分が期待していたメシアとは違ったのです。ヨハネはメシアは悪を裁くために来られると信じておりました。確かに旧約聖書は、メシヤを、悪を一掃し全世界を裁かれるお方として描いています(詩9:3-4等)。
 ところが、イエスさまはいっこうに裁く様子がありません。悪がのさばっているままにさ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はヨハネが描くメシア像とは大きく乖離しているわけですね。そのため、ヨハネは改めて「来るべき方は、あなたでしょうか。それとも、ほかの方を待たなければなりませんか」と質問しているのです。


 この質問は、ヨハネの弟子たちも聞きたかったことに違いありません。また、イエスさまの出来事を目撃した多くのユダヤ人たちも、確かめたかったことのはずです。
 しかし、イエスさまはこの質問に対して直接答えてはおりません。ただ、「行って、見聞きしていることをヨハネに伝えなさい」(4節)と言われます。この「見聞きしていること」というのは、5節にあるように、「目の見えない人は見え、足の不自由な人は歩き、重い皮膚病を患っている人は清くなり、耳の聞こえない人は聞こえ、死者は生き返り、貧しい人は福音を告げ知らされている」という、イエスさまがなさった神さまの御業です。


 この5節の言葉は、ただ、イエスさまがなさった奇跡を並べただけではありません。これは、旧約聖書の預言者がかつて語った終わりの日の出来事を並べたものでもあります。いわば、これは旧約聖書の引用なのです。つまりそれは、何を信じるべきかという信仰の拠り所をはっきりさせるためであ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ただ、神の力を借りて不思議な業をなさったわけではなく、神さまの御心を行うために、神の言葉を実現されたのです。ですから、既に告げられていた預言者の言葉を信じていれば、イエスさまが来るべき方か、そうではないかが分かります。ヨハネと弟子たちが、聖書の御言葉を信じるのであれば、イエスさまが来るべき方だと分かります。しかし、聖書を神の言葉と真剣に受け止める信仰がなければ、イエスさまを来るべき救い主と信じる手立てはありません。


 これは私たちにとっても同様です。私たちがイエス・キリストを、人間を罪の裁きから救う方と信じるかどうかは、聖書がこうして告げている、キリストについての証言をそのまま受け入れるかどうかです。人間イエスが誰だったかと、科学的な方法で細かく分析してみても、はっきりした答えは得られません。今日の私たちにも伝えられている、この聖書全体を通して知らされている、神の御業に触れることが、救い主を知る唯一の手段です。


 イエスさまは、ヨハネの弟子たちに、「行って、見聞きしていることをヨハネに伝えなさい」と言われました。あなたがたは、自分で見たこと、聞いたことを伝えなさい、と言われたのです。これは、私たちにも言われていることだと思います。イエスさまを信じる人は、自分がイエスさまに出会ったこと、そのことを伝えていくのです。


 神学校の時に、毎日のように聖書について、また、神学について研鑽を重ねなさいと教えられました。しかし、それと同時に「分かっただけのイエスさまを伝えなさい」と教えられました。確かに、聖書のこと、信仰のことを私たちはもっと深く知る必要があります。しかし、背伸びしなくてもいいのです。イエスさまについての深い知識やたくさんの体験がなければ伝えられない、と考えなくてもいいのです。今、自分が出会った、今、自分が分かったイエスさまを伝えていったら良いのです。


 イエスさまは、ヨハネの弟子たちに最後にこう言われました。「わたしにつまずかない人は幸いである」(5節)。バプテスマのヨハネは、自分が考えていたような救い主ではないイエスさまにつまずいてしまいました。私たちもそういうこと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イエスさまを信じたら、こういう人生になるのではないか?と期待していたけれど、そうはならなかった。ある人は、イエスさまを信じても、色々な試練が起こってくるではないかと疑問を持つかもしれません。その時、私たちもイエスさまにつまずくのです。


 けれども、私たちはそこで留まってはなりません。そのつまずきを超えていくのです。自分の思い描く、自分の思い通りの神さま、信仰、人生を超えていくのです。悔い改めというのは、まさにそういうことです。私が中心ではありません。私が思い描くことではないのです。神さまが中心です。神さまが私に語っていることを聴いて従うのです。信仰生活において、聖書から神さまの言葉を聴くこと、祈ることが欠けているなら、前に進むことはできません。なぜなら、神さまを信じていると言いながら、それは神さまを、神さまの言葉を無視しているようなことだからです。


 私たちは、悔い改め、神さまの方に心を向けていくのです。先ほど、「分かっただけのイエスさま」と言いましたが、十年前の分かっただけのイエスさま、五年前の分かっただけのイエスさまではなく、日々新たに、イエスさまに出会っていきましょう、イエスさまの恵みをもっともっと知っていきましょう。


 イエスさまは7節から14節まで洗礼者ヨハネについて語られております。その内容をひと言で言いますと、ヨハネは旧約聖書に出てくる預言者以上に大切な働きをしてくれた、と評価しているのです。預言者の中の預言者だ、と。しかし、11節ではこうも言っておられます。「はっきり言っておく。およそ女から生まれた者のうち、洗礼者ヨハネより偉大な者は現れなかった。しかし、天の国で最も小さな者でも、彼よりは偉大である。」(11節)


 イエスさまが絶賛した洗礼者ヨハネ、しかし、それよりも偉大な者、それは、「天の国で最も小さな者」というのです。これは、いったい誰のことでしょうか?
 「天の国で最も小さな者」。それは、イエスさまを救い主と信じる一人一人のことです。つまり、皆さん一人一人が、「天の国で最も小さな者」なのです。
 ここで一つ、注意したいことがあります。それは、「小さな者」とイエスさまがおっしゃっていることです。私たちは、小さな者なのです。大きくなろう、あるいは、大きく見せようとしてしまう私たちですが、神さまの目には、私たちは本当に小さな者なのです。私たちは、神さまによって造られ、愛され、生かされています。生きるために必要なものすべては神さまから与えられています。神さまなしには生きていけない小さな私たちです。ところが、「天の国で最も小さな者でも、彼よりは偉大である」。バプテスマのヨハネよりは偉大である、と主は言われました。これは、ヨハネよりも偉いとか、立派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天の国に入れられること、神さまの救いにあずかること、それがどんなに大きな恵みであるのか、そのことをイエスさまは語られたのです。
 神さまの前には小さな私たちが、神さまの大きな恵みによって救いへと導かれました。このことをしっかりと心に刻んで歩んでいきましょう。


【2025년 5월 25일 주일예배(요약판)】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 
              마태복음 11장 1~19절


 오늘의 성경 부분은 예수님께서 참으로 구세주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6절에서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할 뻔한 인물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처음에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그리스도(구세주)시다”라고 믿고 증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29-30)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절)라고, 즉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이십니까?”라고 묻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와는 달랐습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악을 심판하시고, 의를 세우실 분이라 믿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은 메시야를 그런 분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시 9:3-4등).
 그런데 예수님은 악을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죄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요한이 그리던 메시아상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다시금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요한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목격한 많은 유대인들도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직접 대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4절)고 하십니다. 이 “듣고 보는 것”이라는 것은 5절에 있는 것처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예수님께서 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5절의 말씀은 단지 예수님께서 하신 기적을 나열한 것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선지자가 일찍이 말한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나열한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구약성경의 인용입니다. 즉 그것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신앙의 근거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하나님의 힘을 빌려 이상한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말씀하신 선지자의 말을 믿으면 예수님이 오실 그분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과 제자들이 성경 말씀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오실 그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을 오실 구세주라고 믿을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을 죄의 심판에서 구원하는 분으로 믿는지는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일지 여부입니다. 인자 예수가 누구였는지 과학적인 방법으로 세밀하게 분석해봐도 뚜렷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이 성경 전체를 통해 알려진 하나님의 역사에 접하는 것만이 참된 구세주를 아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신들은 스스로 본 것, 들은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그 체험을 전해가는 것입니다.


 신학교 시절, 매일 성경과 신학을 깊이 배우라고 지도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지금 이해한 만큼의 예수님을 전하라”고도 배웠습니다. 물론 우리는 믿음과 성경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억지로 과장하거나 꾸며낼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깊은 지식이나 많은 체험이 없으면 전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내가 만난 예수님, 지금 내가 이해한 만큼의 예수님을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6절). 세례 요한은 자신이 생각하던 메시아상과 다른 예수님의 모습에 실족하였습니다. 저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런 인생이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왜 이렇게 시련이 많은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멈추어선 안 됩니다. 그 실족을 넘어서야 합니다. 내 생각, 내 계획대로 움직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나 자신을 내려 놓고 나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따르는 삶이 진정한 신앙 생활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회개하며,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아까 “내가 이해한 만큼의 예수님”을 말했지만, 10년 전, 5년 전의 예수님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더 깊이 알아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7절부터 14절까지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1절).


 예수님께선 극찬하신 세례 요한,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자, 그것은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게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그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 그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바로 이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작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주 더 크고 위대해지고 싶어 하며, 그렇게 보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는 모두 작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보다 위대하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요한보다 위대하다거나 훌륭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그 일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작은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으로 인도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큰 복이요, 가장 큰 영광입니다. 이 은혜를 깊이 새기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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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05月25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