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05月18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5月18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ミカ書(미가) 14章 20節
〇讃 頌 讃頌歌 3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23 (詩編43編 )
〇讃 頌 讃頌歌 439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0章 32~42節
〇説 教 「自分の十字架を担って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4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5月 1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自分の十字架を担って」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0章32~42節
今日の聖書箇所は、日本語の聖書には、小見出しが三つ付いていて、三つの話に分けられるように思いますが、そのどれもが実は、一つのテーマの中にあるわけですね。それは、イエスさまの弟子であること、すなわち、クリスチャンとしてどのように生きるのか、ということです。
それではまず、32~33節の「イエスの仲間であると言い表す」ということですが、これは「信仰告白」を意味しています。信仰告白とは、「イエスは主である」と告白し、自分がクリスチャンであることを表明することですが、それは別に人前で「私はクリスチャンです」と言い表すことだけを言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がクリスチャンであることは、余程隠そうとしない限り、周りの人には明らかになってしまうものだからです。信仰とはそういうものです。本来、信仰とは、隠しておくことなんて出来ません。
そして、それは単に人前で信仰が明らかになるだけではなくて、その姿をイエスさまもまた見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私たちは、自らの信仰の歩みが人にどう見られているかということが気になるかもしれませんけれど、それ以上に大切なことは、イエスさまが見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イエスさまは、私たちが父なる神さまの御前に立つ時に、私たちがクリスチャンとしてきちんと歩んだのならば、その時にイエスさまは私たちを仲間だと言ってくださるし、そうでないのならば、知らないと言う、というのです。
父なる神さまの御前でイエスさまの仲間だと言われるということは、イエスさまの命、復活の命に与るということ、永遠の救いに入れ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逆に、イエスさまに知らないと言われるということは、永遠の滅びに定め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
ここではっきりし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私たちがクリスチャンであるということは、自分の主義主張、生き方、信念といったものではなくて、命の問題だということです。この肉体の命を超えた永遠の命、まことの命の問題、イエスさまとの関係・神さまとの関係の問題だということです。もちろん信仰というのは、私たちの生き方や信念といったものに影響を与えます。その人が生きている社会や環境の中でクリスチャンであるならばこう考え、こう行動すべきだというものがあります。ただ、その社会や環境といったものは、実に多様です。人によって違います。ですから、クリスチャンとしての生き方や信念というものも人それぞれ違いがあるかと思います。
しかし、神さまとの関係・イエスさまとの関係、そこには全く多様性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は私の主、私はイエスさまの僕、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血によって一切の罪を贖っていただいた。復活の命、永遠の命に与る者にしていだだいた。ここに多様性などありません。そして、ここに私たちの命が懸かっています。この神さま・イエスさまとの関わりに私の命が懸かっているのです。このことをわきまえた者として生きる。それが、私たちの歩みなのです。
このことをわきまえませんと、「人々の前で」信仰を言い表すことをためらうということが起きてしまいます。「人々の前で」ということは、この世の生活の中でということです。その最も身近なものが家族だと思います。家族というものは、神さまが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素晴らしい恵みの一つです。しかし、イエスさまは34~37節において、この家族が信仰の故に敵となることもあると言われています。
ここで、読み違えてはいけないことは、イエスさまが家族を愛するのか、神さまを愛するのか、どちらを選ぶのかと問い詰め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は選べません。どちらも愛するのです。ただ、そこで間違えていけないことは、イエスさまは真の命のことを問題としているのです。家族は自分に平安を与え、喜びを与えてくれます。ですから、家族が皆仲良く暮らせれば、贅沢をしなくても何とか生活していていければ、それ以上何を望むことがあろう。そう思っていた私たちでした。それが39節の「自分の命を得ようとする者」と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しかし、イエスさまは神さま抜きの命、神さま抜きの幸い、それで本当に良いのかということを問題にし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家族以上に大切なものがある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それが神さまとの関係・イエスさまとの関係です。神さまの愛、イエスさまの愛です。この愛によって、イエスさまというお方を通して私たちに与えられたまことの命、永遠の命です。
この「イエスによって与えられる真の命」を第一とするのか、または、「目に見えるこの世の命、自分の命」を第一とするのか、そこには対立が起きるのです。そして、イエスさまは「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は、わたしにふさわしくない。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も、わたしにふさわしくない」(37節)と言われました。
イエスさまは単に「父や母を愛する者」「息子や娘を愛する者」と言わ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わたしよりも父や母を愛する者」「わたしよりも息子や娘を愛する者」と言われたのです。家族を愛する。それは自然なことです。しかし私たちに与えられる救いの恵み、命の恵みは、自然を超えた恵みです。神の子とされ永遠の命に与るという救い。これは自然に与えられるものではないし、自然の中にあるものでもありません。これは、実に驚くべき恵みです。イエスさまは、この恵みにしっかりとどまりなさいと、私たちに語りかけ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
そして、「自分の十字架を担う」というのは、このように神さまを第一とする歩み、イエスさまを第一とする歩みをする上で、私たちはどうしても担わなければならないものがあ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それは「自分の十字架」ですから、それぞれ担っている十字架は同じではありません。皆違っています。他の人と比較す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十字架を担うということは、大変なこと、重荷を担うということです。少しも大変じゃないというのは、十字架ではないでしょう。しかし、この自分の十字架は、それを担うことによって自分が倒れてしまうようなものでもありません。神さまは、私たちが担うことが出来ないものまで担わせようとはなさいません。この十字架というのは、それを担うことによって私たちの歩みが、クリスチャンとしてはっきりしたものになるというようなものなのです。
神さまとイエスさまを第一とする中で、どうしても担わねばならないものが、自分の十字架です。具体的には、教会の奉仕だったり、地域や家庭において仕えるということもあるでしょう。介護も、神さまの召しとして受け止めるならば、それもまた私の十字架ということになるでしょう。私たちは、自分が置かれている状況の中で、神さまの召しを受けて、自分の十字架を担っていくのです。その歩みこそが、人々の前でイエスさまへの信仰を告白していくことなのです。
そして、そのような私たちの歩みを見て、「大変だね」と言って水一杯でも飲ませてくれる人がいたら、その人は私たちと同じ報いを受けるとイエスさまは言われました。イエスさまに従う者に対して、すべての人が喜んで受け入れてくれ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受け入れてくれる人の方が少ないでしょう。しかし、もし、自分の十字架を担って歩んでいる人に対して、心寄り添い、水一杯でも飲ませてくれる、助けてくれる、励ましてくれる人がいるならば、そういう人のことも神さまは見ておられ、必ず報いてくださると、イエスさまは言われているのです。それは、私たちが自分の十字架を担って生きることを通して、私たちと出会う人々に神さまの報い、神さまの救い、神さまの愛に与る機会を与えることにもな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またこのことは、イエスさまの福音は、私たちが水一杯を与えてもらうほどに小さくなる在り方の中で、周りの人々に伝わっていくということな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私たちが、上から偉そうに「神とは」「救いとは」そんな風に語っても、誰も聞いてくれません。しかし、小さな者として、人に仕え神さまに仕えていく歩みの中で、福音は伝わっていくということなのです。
私たちは小さきキリストの使者として生かされております。いと小さきキリストの使者であるが故に、人々に福音を携えていけるのです。ですから、自らの小ささを嘆くのではなくて、それぞれが出来ることを出来るように、神さまから召された者として、それぞれの十字架を担って、与えられた所において、今週もまた、御国に向かって歩んで行きたいと願います。
【2025년 5월 11일 주일예배(요약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마태복음 10장 32~42절
오늘의 성경 본문에는 일본어 성경에서는 소제목이 세 개 붙어 있어 세 개의 이야기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내용은 사실 하나의 주제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우선, 32절과 33절에 나오는 “사람 앞에서 나(예수)를 시인한다”에 대해 살펴보면, 이는 곧 “신앙 고백”을 의미합니다. 신앙 고백이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고,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밝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사람들 앞에서 “나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일부러 숨기려 하지 않는 한 주변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본래 신앙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사람들 앞에서 신앙이 드러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도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신앙의 삶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는가를 신경 쓸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로 살아왔다면,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정해주실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부인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께서 시인하신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생명,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영원한 구원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부인하신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으로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자신의 주의나 주장, 삶의 방식이나 신념과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육체의 생명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 참된 생명의 문제이며, 예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은 우리의 삶의 방식이나 신념 등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환경 속에서 크리스천이라면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회나 환경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의 방식이나 신념 역시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전혀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인해 모든 죄를 대속받았습니다. 부활의 생명,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의 생명이 걸려 있습니다. 이 하나님, 예수님과의 관계에 나의 생명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 자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길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면,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일을 주저하게 됩니다. 여기서 “사람들 앞에서”란, 이 세상에서의 삶 가운데서라는 의미입니다. 그 중 가장 가까운 관계는 가족일 것입니다. 가족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4절부터 37절에서 이 가족이 신앙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족을 사랑할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몰아붙이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둘 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혼동해서는 안 되는 점은, 예수님은 참된 생명의 문제를 다루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가족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기쁨을 줍니다. 그러므로 가족이 모두 화목하게 살고, 사치하지 않더라도 그럭저럭 생활해 나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해 왔던 우리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39절에서 말씀하시는 “자기의 생명을 얻으려는 자”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없는 생명, 하나님 없는 행복, 그것으로 정말 괜찮은가를 문제 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 예수님이라는 분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참된 생명”을 첫째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생명, 자신의 생명”을 첫째로 삼을 것인가, 거기에는 충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3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 생명의 은혜는 자연을 초월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구원. 이것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자연 속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 은혜에 굳건히 머물러 있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란, 이와 같이 하나님을 제일로 삼고, 예수님을 제일로 삼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 각자가 어떻게 해서든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같지 않습니다. 모두 다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힘든 일,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전혀 힘들지 않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기 십자가는, 그것을 짊어짐으로써 우리가 쓰러지고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짊어지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이 십자가란, 그것을 짊어짐으로써 우리의 걸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해지는,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첫째로 삼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구체적으로는 교회에서의 봉사일 수도 있고, 지역 사회나 가정에서 섬기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간병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 역시 나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걸음이 곧,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걸음을 보고 “힘드시겠어요” 하며 물 한 잔이라도 건네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와 같은 보답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를 모든 사람이 기쁘게 받아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받아주는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마음을 나누고, 물 한 잔이라도 주며, 도와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반드시 보답해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삶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상급,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이란, 우리가 물 한 잔을 받을 정도로 작아지는 자세 속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져 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위에서 거만하게 “하나님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며 말해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자로서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걸음 속에서, 복음은 전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그리스도의 사자이기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작음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로서,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어진 자리에서, 이번 주도 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고자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