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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年08月23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8月23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コリント 二(고린도후서) 5章 21節
〇讃    頌    讃頌歌 32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46 (詩編 104編 )
〇讃    頌    讃頌歌 446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6章 36~46節
〇説   教    「目を開けてみると
         (눈을 뜨고 바라보면)」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33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8月 2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目を開けてみると」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6章 36~46節


 今日の聖書箇所は「ゲッセマネの祈り」と言われる、イエスさまが十字架を前にして苦しみの言葉を吐きながら祈られた場面です。


 イエスさまはゲッセマネというところで、弟子たちに「わたしが向こうへ行って祈っている間、ここに座っていなさい」と言われ、ペトロとヤコブとヨハネの三人を連れてさらに奥へ進んで祈られました。それは激しい祈りでした。イエスさまは「悲しみもだえ始め」、ペトロたち三人に「わたしは死ぬばかりに悲しい。ここを離れず、わたしと共に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言われるほどでした。


 イエスさまは間もなく、ユダの裏切りによってご自分が捕らえられることを知っていました。そして、ご自分がどのように殺されるのかも知っていました。そして何よりも、ご自分が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理由を知っておられました。それゆえに、悲しみもだえながらその死を恐れ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が恐れた死とは、単に命を失う、殺されるという死ではありません。罪の裁きによる死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が裁かれる死、それは神さまとの関係が断たれることを意味します。


 神さまとの関係とは、愛の関係と言えるものです。神さまはいかなることがあっても私をお見捨てになることはなく、私を覚えていて、私を見守っていてくださる。そのような関係を神さまは、私という存在が生まれる前から、また、私という存在が死んでなくなっても持ち続けてくださいます。永遠なる神さまが愛の関係をもって私とつながっていてくださることによって、私という存在は消えてしまうことなく生き続けるのです。


 しかし、罪の報酬として死は、そのような神さまとの関係が絶たれることを意味します。それが、罪もない神さまの独り子であられるイエスさまにとっては耐えがたいことなのです。
 それゆえに、イエスさまは、「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と祈られたのです。


 「ゲッセマネ」は、「オリーブ油の絞り場」という意味があります。三度うつ伏せになって祈られイエスさまは、まさに重い石臼を背負っておられました。オリーブの実が重い石臼で砕かれて絞り尽くされた姿です。油絞りで最初に取れる油は神殿の灯火用でした。二回目に取れる分は家庭の食用油になり、三回目は家庭の灯火用、四回目の最後の搾りかすは石鹸になります。イエスさまが献げた祈りは、私たちを照らす光であり、私たちを清めるもので、そこには一切の無駄がありません。それゆえに、イエスさまが献げた祈りのすべてが父なる神さまの耳に届き、答えられるのです。


 「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この「杯」とは、先週の聖餐の制定の中で出てきた杯がイエスさまの血を意味しておりましたが、ここに出てくる「杯」は、十字架の苦難を通して、イエスさまがすべての人の身代わりとして罪を飲み干す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
 例えて言うなら、その杯には全人類の濃縮された汚い罪が入っているのです。また、その杯には、罪に対する「神さまの怒り」(エレミヤ25:15)が詰め込ま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はそれを飲み干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十字架上で、罪と何の関わりもないイエスさまは、罪そのものとされたことで聖なる神さまとの断絶を経験することになります。イエスさまは、私たち罪人が通るべき死の絶望を身代わりで味わってくださっ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は「できることなら」と父なる神さまに言われました。もちろん、父なる神さまは何でもできます。しかし、御子イエスさまの前に置かれた杯を取り除くことはしませんでした。それは、あなたを愛するがゆえの父なる神さまの決断だったのです(ヨハネ3:16)。
 ですから、イエスさまを世に遣わすときに、父なる神さまの心はすでに引き裂かれたのです。十字架へ歩む最終的な決断はイエスさまに委ねられましたが、イエスさまは「父よ、わたしが飲まないかぎりこの杯が過ぎ去らないのでしたら、あなたの御心が行われますように」(42節)と祈り、十字架へ向かわれました。


 イエスさまのゲッセマネの祈りは、私たちに祈りの模範を示してくださっています。それは、父なる神さまの前では格好をつける必要はなく、正直な気持ちを何でもぶつけていいということです。十字架の犠牲となった主イエス・キリストの執り成しを通して、私たちは神さまの御前へ出ていける神の子とされました。
 ですから、私たちは一切のためらいを捨て去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私たちが目の前にある困難について油絞りのように祈り尽くすとき、神さまは、苦難を乗り越える力の油注ぎを与えてくださり、その先に用意されている復活の勝利と平安を用意し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に「ここを離れず、わたしと共に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38節)と言われました。しかし、弟子たちはイエスさまがその身を絞り出すかのように激しい祈りを献げている横で眠ってしまいました。それしても弟子たちは、なぜ眠ってしまったのでしょうか。


 その理由は、私たちの肉体が弱いということもあるでしょう。イエスさまと共に目を覚ましておこうという気持ちがあっても体がついて来ず、眠ってしまったのかも知れません。でも、そんな単純な話ではないように思います。人間はどうしようもない厳しい事態、絶望的な状況を前にした時、眠りに逃げ込むことで自分を守ろうとする特性があります。そのときの眠りは単に休養のための眠りというのでもありません。物事を感じ取って思考する機能を停止させ、感覚を麻痺させて、現実から逃避するための眠りです。現実逃避ではありますが、耐えられない苦痛から自己を守る本能的なものです。


 弟子たちは、過越の食事をイエスさまと共にした時、イエスさまのただならぬ様子を感じ取っていました。裏切りの予告、パンとぶどう酒による聖餐、弟子たちは「わたし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と抵抗しました。それでも、ゲッセマネで悲しみもだえながら祈るイエスさまのお姿を見たときには、彼らはもう何も考えられなくなってしまいました。彼らはイエスさまと共に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よく分かっていました。でも、それが出来ないのです。それが、イエスさまが言われる「心は燃えても、肉体は弱い」(41節)と言うことでしょう。本当に目覚め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ところで、眠っている人のように感覚が鈍り、麻痺してしまうという人間の弱さのことをキリストはおっしゃったのです。
 これは他人事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もあの時、目覚めていなかったために、模範として従うべきキリストの姿が見えなくなり、人としての心が麻痺して、キリストが願われることとは反対のことをしてきた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ゲッセマネで油を絞り出すかのように祈られるイエスさまのお姿を決して忘れてはいけません。私たちが祈れないほど苦しい時、また、起き上がれないほど悲しい時、倒れたままでも良いですから、もう一度目を開けて見てください。あなたと共に悲しみ苦しみながら共に祈っているイエスさまのお姿が、きっと見えるでしょう。
 あなたは一人ではありません。主イエスさまが取り成してくださるのですから、天の父なる神さまは聞いてくださっています。あなたの思いを超えた神さまの最善が、その時、始まるのです。


【2026년 8월 23일 주일예배(요약판)】

     “눈을 뜨고 바라보면”
                            마태복음 26장 36~46절


  오늘의 성경 본문은 흔히 “겟세마네의 기도”라고 불리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토로하시며 기도하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을 데리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매우 간절하고 격렬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시며 베드로와 세 제자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유다의 배신으로 자신이 붙잡히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게 될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퍼하시며 괴로워하시고, 그 죽음을 두려워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신 죽음은 단순히 생명을 잃는 것, 혹은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죽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란 사랑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기억하시며,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한 관계를 하나님께서는 내가 존재하기 전부터, 또한 내가 죽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후에도 계속해서 유지하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사랑의 관계로 나와 연결되어 계시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삯인 사망은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는 그것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겟세마네”라는 말에는 “올리브 기름을 짜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 번이나 엎드려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치 무거운 맷돌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계신 것과 같았습니다. 올리브 열매가 무거운 돌로 된 맷돌에 짓눌려 으깨지고, 그 안의 기름이 다 짜여 나오는 모습과 같습니다.
  올리브를 짜서 처음 나오는 기름은 성전의 등불을 밝히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나오는 기름은 가정에서 식용유로 사용되었고, 세 번째로 나온 기름은 가정의 등불을 밝히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찌꺼기는 비누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드리신 기도는 우리를 비추는 빛이 되었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기도에는 단 하나도 헛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드리신 모든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귀에 이르렀고, 응답되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잔” 은 지난주 성찬 제정의 말씀에서 나왔던 잔과 연결됩니다. 지난주에 그 잔은 예수님의 피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잔”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고 그 죄를 다 마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유해서 말한다면, 그 잔 안에는 온 인류의 농축된 더러운 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잔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예레미야 25:15)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마셔야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죄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죄 그 자체가 되심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과 단절되는 경험을 하게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이 지나가야 할 죽음의 절망을 우리 대신 맛보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 앞에 놓인 그 잔을 거두어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결정이었습니다(요한복음 3:16).
  그러므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이미 찢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실 최종적인 결정은 예수님께 맡겨졌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절)
  그리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애써 자신의 모습을 꾸밀 필요가 없으며,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무엇이든 그대로 내어놓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조금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눈앞에 놓인 어려움을 올리브 기름을 짜내듯이 끝까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이겨낼 힘의 기름을 부어 주시고, 그 너머에 준비해 놓으신 부활의 승리와 평안을 허락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3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온몸의 기름을 짜내듯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바로 곁에서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잠이 들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에는 우리의 육체가 약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으려고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잠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잠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때의 잠은 단순히 몸을 쉬게 하기 위한 잠이 아닙니다.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는 기능을 멈추고, 감각을 마비시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잠입니다. 현실 도피이기는 하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했을 때부터 예수님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배신에 대한 예고가 있었고, 떡과 포도주를 통한 성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강하게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겟세마네에서 슬퍼하시고 괴로워하시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이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41절)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정말 깨어 있어야 할 순간에 마치 잠든 사람처럼 감각이 둔해지고 마비되어 버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때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본받아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이 마비되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과는 반대되는 일을 해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겟세마네에서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듯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너무나 힘들어서 기도조차 할 수 없을 때, 또 너무 슬퍼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때에도, 그대로 쓰러져 있어도 좋으니 다시 한 번 눈을 들어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과 함께 슬퍼하시고 고통받으시며, 함께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최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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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6年08月23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