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年09月13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9月13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ルカによる福音書(누가복음) 22章 31~32節
〇讃 頌 讃頌歌 43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54 (詩編 126編 )
〇讃 頌 讃頌歌 149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6章 69~75節
〇説 教 「ペトロの否認 (베드로의 부인)」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00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9月 1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ペトロの否認」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6章 69~75節
今日の聖書箇所は、ペトロがイエスさまのことを三度「知らない」と言った聖書箇所です。皆さんもよくご存じの聖書箇所ですので、改めて説明する必要もないでしょう。ただ、ペトロの否認は、最初は誤魔化す程度の否定だったものが、二度目は誓って否定し、そして最後は、「呪いの言葉さえ口にしながら」否認しております。最後の否認に至っては、イエスさまとの関係を完全に断絶するものとなっています。
このペトロの姿の中に、私たちの弱さと罪深さが象徴されております。そして、それと同時にこの中に、私たちは神さまの支配と導きがあることを覚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
何故かと言いますと、ペトロが三回目に「知らない」と言ったその時に、鶏が鳴いたのです。偶然と言えばそれまでですが、これは偶然ではないのです。これは神さまの御計画の中で起きていることなのです。
ペトロの立場で考えますと、困難が次々に押し寄せてくるように感じられたでしょう。でも、神さまの側から見ますならば、色々な人々の出会いを通して、ペトロの弱さを次々に明らかにしようとされているのです。そういう神さまの導きがあるのです。それがどんどん強くなって行きます。
それに対して、ペトロの否定もどんどん強くなって行き、最後はもう「呪われても良い」と、強く断定してしまいます。
つまり、ペトロ自身の内側にある「弱さ」というものが、はっきりと現れていくわけですね。ここでは、そういう神さまの導きがあったのです。
私たちもこれと同じような経験をすることがあるかと思います。私たちの立場からすれば、「何でこう次々に試練がやってくるのか」、「どうして神さまはこのようことをされるのか」と思いたくなるようなことが起こります。
でも実は、神さまの視点から見ますならば、その導きの中で、私たちの弱さとか不信仰、また頑なさや汚れ、罪と言ったものが浮き彫りにされていくのです。
私たちは、自分の本当の姿なんて見たくありません。平素はそれを出来るだけ隠して生きておりますから、当然です。でも、神さまは私たちにそれを見せようとされます。自分の深い罪に気づかせようとされます。そこにも神さまの御手が働いているのです。
でも、それって実は、ペトロにとって大事な経験であったように、私たちにとっても、とても大事な経験であるのです。
それから最後、鶏の声を聞いたその時に、ペトロは外に出て、激しく泣きました。
ペトロは自分の愚かさ、罪深さ、自分の本当の姿が分かった時、泣き崩れる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まで頑張って来たものもすべて崩れていってしまったのです。
ただ、ペトロが流した涙には、もう一つ別の意味があったと思います。それはイエスさまの深い愛を知らされたことによる涙ということです。
「はっきり言っておく。あなたは今夜、鶏が鳴く前に、三度わたしのことを知らないと言うだろう」(26:34)と、イエスさまはペトロに言われていました。ペトロが決して強くないこと、裏切ること、全部知っておられました。それでも、イエスさまはペトロを受け入れ、愛されました。ペトロはこの時、イエスさまの愛がはっきりと分かったのです。
ルカによる福音書には、ペトロが「知らない」と三度目に言った時、「主は振り向いてペトロを見つめられた」(ルカ22:61)と記されています。ペトロが三度目に「知らない」と言ったときに、イエスさまと目が合うわけです。そのイエスさまの眼差しを見た時に、鶏が鳴きます。ペトロはイエスさまの愛の眼差しを見て、激しく泣いたのです。
これは本当に、ペトロにとって貴重な経験となりました。絶対に、ペトロに必要な経験であったのです。まず、本当の自分の姿を知ること。そして、イエスさまの深い愛を本当に知ること。この二つが、ペトロが変わるためには必要でした。
私たちもまた、自分の弱さ、惨めさ、罪深さを知って泣くという経験と、そこでイエスさまと出会って、イエスさまの深い愛の中に自分が生かされていることを知って泣くという経験が、私たちには必要なのです。
そしてまた、この二つの経験は、繋がっており、本来、一つの経験であることを今日の聖書箇所は教えているのです。
ところが、この二つの経験は、私たちの中では多くの場合、別々なものと捉えがちです。私たちがイエスさまの愛を感じる時というのは、何か良いことがあったとか、病気が治ったとか、問題が解決したとか、そういう良いことがあった時に感じるかと思います。そのような時には、「自分は本当に神さまに愛されている」「こんなに愛されて感謝だ」と、素直に喜べるかも知れません。
でも、自分が失敗した時とか、挫折した時、自分の惨めさと向き合って苦しんでいる時というのは、イエスさまの愛を感じることが出来ません。本当はそういう時こそ、イエスさまと出会って、イエスさまの深い愛を体験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そういう時に限って、自分の世界の中に閉じこもってしまって、「もう自分は本当に惨めだ、自信がない、自分は駄目だ」と、どんどん自分を責めていってしまいます。そういう時こそ、イエスさまの愛の眼差しを感じなくてはいけないのに、そういう時に限って、イエスさまと出会えない、ということがあるわけです。
そのため、私たちは、本当の神さまの愛の大きさに気づかない、分からないのです。信仰がいつまで経っても表面的になってしまいます。
ですので、私たちが信仰的に本当に成長し、変わっていくためには、ペトロが流した涙、自分自身の惨めさのために流した涙、そしてそれと同時にイエスさまの深い眼差しに気づき流した涙、この涙を私たちも流さ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この「ペトロの否認」の物語は、四つの福音書すべてに記録さ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つけられていく道を辿っていく、その過程の中に必ず出てくる物語なのです。イエスさまがどのように十字架に向かっていかれたかという、そのプロセスの中に、この「ペトロの否認」の物語があって、それはイエスさまの十字架が、まさにペトロのためであったということを主張しているのです。
それは、要するにイエスさまの十字架って、こんな惨めで、罪深い自分のためにイエスさまは苦しんで、身代わりとなって十字架に架かってくださった。それほどに神さまは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ているということを、私たち一人一人に教えておられるのです。
【2026년 9월 13일 주일예배(요약판)】
“베드로의 부인”
마태복음 26장 69~75절
오늘 성경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해 버린 장면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성경 말씀이니,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베드로의 부인은 처음에는 얼버무리는 정도의 부인이었지만, 두 번째는 맹세하면서 부인하고 그리고 마지막은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인에 이르러서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것이 됩니다.
이 베드로의 모습 속에 우리의 연약함과 불신앙이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와 인도하심이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세 번째에 “모른다”고 말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려움이 계속해서 밀려오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람과의 만남을 통하여 베드로의 연약함을 하나씩 드러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도하심은 점점 더 강해져 갔습니다.
그에 비례하여 베드로의 부인도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마지막에는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까지 하면서 강하게 단정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연약함’이라는 것이 점점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왜 이렇게 계속해서 시련이 찾아오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일을 하시는가’라고 생각하고 싶어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인도하심 가운데서 우리의 연약함과 불신앙, 그리고 완고함과 더러움, 죄라고 하는 것들이 하나씩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그것을 될 수 있는 한 감추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깊은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곳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베드로에게 중요한 경험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험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악됨, 자신의 진짜 모습을 깨달았을 때, 그저 무너져 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애써 버텨 왔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흘린 눈물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된 데서 흘린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26:34)라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결코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배신하는 것,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받아 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예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베드로가 세 번째로 “모른다”고 말했을 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 22:61)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로 “모른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눈길을 바라보는 순간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의 눈길을 보고 몹시 울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베드로에게 귀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아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진정으로 아는 것. 이 두 가지가 베드로가 변화되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과 죄악됨을 깨닫고 우는 경험,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깊은 사랑 안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는 경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경험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본래 하나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오늘의 성경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가지 경험을 대부분 서로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때는 어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병이 나았을 때,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와 같이, 좋은 일이 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에는 ‘나는 정말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구나’, ‘이렇게 사랑받으니 감사하다’고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했을 때, 좌절했을 때, 자신의 비참함과 마주하며 괴로워할 때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실 바로 그때야말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런 때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버립니다. ‘나는 정말 비참하다. 자신이 없다. 나는 안 되는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점점 더 자신을 책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야말로 예수님의 사랑의 눈길을 느껴야 하는데, 오히려 그런 때에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신앙이 언제까지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 안에서 진정으로 성장하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베드로가 흘린 눈물을 우리도 흘려야 합니다. 자신의 비참함 때문에 흘린 눈물,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의 깊은 눈길을 깨닫고 흘린 눈물. 이 눈물을 우리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시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과정 속에 반드시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는가 하는 그 과정 속에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베드로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란 이런 비참하고 죄 많은 나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나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주신 사건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