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ゴ

メイン画像

2026年09月20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9月20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の手紙 一 (요한일서) 2章 10~12節
〇讃    頌    讃頌歌 10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62 (詩編 143編 )
〇讃    頌    讃頌歌 263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7章 1~10節
〇説   教    「ユダの絶望とペトロの希望
           (유다의 절망과 베드로의 희망)」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25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9月 2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ユダの絶望とペトロの希望」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7章 1~10節


 大祭司カイアファの屋敷で開かれたユダヤの宗教裁判によってイエスさまに死刑判決が下されました。しかし、当時ユダヤ人たちに死刑を執行する権限がありません。そのために、祭司長たちは死刑を執行する権限を持つローマの総督ポンティオ・ピラトに「どうしたら死刑を言い渡してもらえるか」ということを相談、総督ピラトに引き渡しました。そして、11節からポンティオ・ピラトの前で裁判が始まることになります。


 今日の聖書箇所は、その間に、イエスさまを裏切ったイスカリオテのユダの話が挿入されているのです。
 ユダは、イエスさまに死刑判決が下されたのを聞いて、後悔しました。「わたしは罪のない人の血を売り渡し、罪を犯しました」(4節)。このユダの言葉に彼の心境がよく表さ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が無実であることを、ユダはよく分かっていました。そのことを知りながらもイエスさまを売ってしまった。ユダはその自覚にようやく至ったのです。
 なぜ、もっと早く気づかなかったのか。なぜあの時、思い留まらなかったのか。それが後悔というものです。罪の恐ろしさ、人間の弱さをまざまざと示しているのが、このユダの姿です。


 ユダは、自分の重大な過ちに気づき、得た銀貨三十枚を返しに来ました。これは後悔の表れであり、何とか元に戻したいという願いでもありました。勿論、元に戻すことは出来ません。それでも何とかしたいという思いがユダにはあったのです。
 ユダは、どうしようもなく神さまに仕える祭司長たちに助けを求めました。ところが、祭司長たちは「我々の知ったことではない。お前の問題だ」(4節)と、冷たくあしらいます。「我々の知ったことではない」というのは、「私たちには関係がない。お前にやった金だから、お前が始末しなさい」ということでしょう。そして、「お前の問題だ」というのは、「お前の罪の始末は、自分で責任を取れ」という意味です。


 ユダは、もう誰にも頼ることが出来ず、自分自身の罪の象徴である銀貨三十枚を神殿に投げ込む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銀貨三十枚は神殿に返しました。それで心が軽くなったかと言いますと、逆に、「お前の罪の始末は、自分で責任を取れ」と言った祭司長たちの言葉がユダの心に重くのしかかってきます。ユダはこの「罪の始末」を「自分自身の始末」と受け取ったのでしょう。ユダは精神的に追い詰められ、自分の命を絶つしか方法はないと判断したようです。そして、首を吊って死んでしまいました。


 「自分で始末しろ」「自分のことは自分で責任を取れ」というのは、この世ではよくあることです。私たちは自分の行動に責任を取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しかし、自分では責任が取れないこともあります。そんな時、どうすれば良いのでしょうか。
 もし、祭司長たちがこの時、「神さまのもとに行きなさい。心から悔い改めて、神さまに赦しを請いなさい」と言ってくれていたら、もしかしたらユダは救われていたかもしれません。


 ところで、私たちも祭司長たちと同じような言葉を本当に行き詰まっている人に投げかけていないでしょうか。
 自分の人生が後悔だらけで、自分を責めて、思い詰めているいる人たちが、実際にたくさんいるかと思います。誰かに頼りたくても頼れない。「お前の問題だろ。お前がやったんだろ。自分で責任を取れ」と言われてしまう。そういうことって、この世の中には多くあります。普通に考えたら、それは間違いではないのでしょう。
 でも、そうなりますと、その人はどこにも行き場がなくなって、自ら命を絶つという選択しか残らなくなってしまう場合もあります。


 そういう時に、「イエスさまのもとに来たら、必ず救いがある」という希望を私たちはちゃんと語っているでしょうか。それは、大事な教会の務めです。
 この世では、本当に冷たく、殺伐としたメッセージがあちこちで響いています。けれども、どんなに行き詰まっていても、もう取り返しのつかない、後悔だらけの人生であったとしても、イエスさまのもとには必ず救いがあると言うこと、それを私たちはどれだけの思いで、御言葉として伝えているでしょうか。それは教会に委ねられている大切な使命なのです。


 ところで、ユダが神殿に投げ返した銀貨三十枚のことですが、祭司長たちは「これは血の代金だから」と、非常に汚れたお金だから神殿の収入には出来ないと言っています。もともと自分たちが渡したお金なのに、よくそんなことが言えるなあと思ってしまいますが、彼らはそのお金で「陶器職人の畑」を買い、それを異邦人の墓にしました。
 でも、そのことすらも、実は「預言者エレミヤをを通して言われていたことが実現した」(9節)と記されています。すべてが、神さまの御計画の中にあったと聖書は語っているのです。そして、神さまの救いの御計画が、着実に進んでいるのです。


 先週は、ペトロが三度イエスさまのことを知らないと否認した話でした。ペトロも頑張っていたんです。必死にイエスさまについて行こうとしました。でも結局、彼は自分の弱さをさらけ出すことになってしまい、三度も三度も知らないと言ってしまいました。
 そして、鶏が鳴いて、ペトロはイエスさまの言葉を思い出し、外に出て、激しく泣きました。それに続く話として、今日のユダの話があるのです。明らかに、ペトロとユダを対比させています。


 私たちは、ペトロとユダを見比べますと、明らかにユダの方が悪いと考えます。確かに、ユダは明らかに、イエスさまを裏切り、敵である祭司長たちにイエスさまを引き渡し、それでお金までもらっていますから、最悪です。
 一方、ペトロは「たとえ、ご一緒に死なねばならなくなっても、あなたのことを知らないなどとは決して申しません」と、イエスさまに誓いながらも、実際に自分の身に危険が迫りますと、イエスさまのことを「そんな人は知らない」と言い、三度目には呪いの言葉さえ口にしました。ここまで来ますと、どっちが悪いのか、などもう比べられません。


 そして、二人は、とても後悔しました。激しく涙を流しながら、もう立ち直れないほど後悔したのです。
 しかし、一方は自ら命を絶つという選択をし、もう一方はその後、偉大な教会の指導者となりました。この違いは一体何だったのでしょうか。


 先週もお伝えしましたが、ペトロは立ち直れないほど落ち込んで、泣いたけれも、その時に、イエスさまの愛を知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の愛の眼差しに触れたのです。
 それは、ペトロにとってとても惨めな経験だったけれども、イエスさまの愛の豊かさを体験する出来事となりました。そして、十字架と復活を経験し、聖霊を頂き、ペンテコステで力強く語り、多くの人が救われて教会が生まれました。まさに、あの挫折の経験が、神さまに用いられる器へと変えられていく土台となったのです。


 一方ユダは、イエスさまの愛に触れることも、十字架や復活に立ち会うこと出来ずに、罪の中で命を絶って行きました。どこまでも自分の力、自分の思い、自分のこだわりに生き、神さまに委ねることをしませんでした。
 イエスさまは最後までユダのことを「友よ」と呼びかけていました。チャンスはあったのです。でも、ユダはそれを受け取りませんでした。最後まで、神さまに頼ろうとせず、自分の力にすがり、そして倒れて行きました。


 皆さん、私たちはこのユダの姿から学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私たち自身の罪の問題は、自分の力では解決出来ません。人に頼っても解決されません。自分のすべての罪をイエスさまのもとに持って行くしか解決方法はないのです。
 私たちが自分のすべてをイエスさまの前に持って行けた時、私たちは変えられ、赦され、解放されていくのです。本当にイエスさまに用いられる人に変えられて行きます。


 でも、それをしないで、いつまでも自分の罪にこだわって、そこに留まり続けていたら、ユダのようになってしまい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ユダではなく、ペトロのように、イエスさまの愛の眼差しの中で、心砕かれ、悔い改めて、本当に愛の中で成長していけるような、そんなペトロのような人生を歩んでいければと願います。
 どうか、神さまの愛の中で、共に成長して行きましょう。


【2026년 9월 20일 주일예배(요약판)】

     “유다의 절망과 베드로의 희망” 
                           마태복음 27장 ~10절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열린 유대 종교 재판을 통해 예수님께 사형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사형을 집행할 권한을 가진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어떻게 하면 사형을 선고받게 할 수 있겠는가”를 의논하고,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11절부터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재판이 시작됩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은 바로 그 사이에,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삽입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후회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이 유다의 말에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죄하시다는 것을 유다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죄가 없고, 아무런 악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유다는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왜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왜 그때 멈추지 못했을까? 그것이 바로 후회라는 것입니다. 죄의 두려움과 인간의 연약함을 여실히 보여 주는 모습이 바로 유다의 모습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중대한 잘못을 깨닫고, 받은 은 삼십을 돌려주러 왔습니다. 이것은 후회의 표현이었으며, 어떻게든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미 일어난 일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유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제사장들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라고 차갑게 대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은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우리가 너에게 준 돈이니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당하라”라는 말은 “네 죄에 대한 책임은 네가 스스로 져라”라는 의미입니다.


  유다는 이제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게 되어, 자신의 죄를 상징하는 은 삼십을 성전에 던져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 삼십을 성전에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을까요? 오히려 “네 죄에 대한 책임은 네가 스스로 져라”라고 말한 제사장들의 말이 유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유다는 이 ‘죄를 처리하는 일’을 ‘자기 자신을 처리하는 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유다는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렸고,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그리고 목을 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네 일은 네가 책임져라”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 힘으로 책임질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대제사장들이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므로, 그때 유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라고 말해 주었다면, 어쩌면 유다는 구원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대제사장들과 같은 말을, 정말로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에게 던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이 저지른 실패와 후회 때문에 스스로를 책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네 문제잖아. 네가 한 일이잖아. 네가 책임져”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런 일은 이 세상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보통 생각하면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져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오면 반드시 구원이 있습니다”라는 희망을 제대로 전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교회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정말 차갑고 삭막한 메시지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막다른 길에 몰려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가득한 인생이라 하더라도, 예수님께는 반드시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교회에 맡겨진 중요한 사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성전에 되돌려 던진 은 삼십에 관하여, 대제사장들은 “이것은 피 값이기 때문에” 매우 부정한 돈이므로 성전의 수입으로 삼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원래 자신들이 건네준 돈인데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들은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이방인의 묘지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조차도 사실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9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가운데 있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착실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베드로도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 이야기에 이어지는 것이 바로 오늘의 유다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베드로와 유다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를 비교해 보면, 분명 유다가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유다는 분명히 예수님을 배반했고, 원수인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으며, 그 대가로 돈까지 받았습니다. 정말 최악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맹세하면서도 실제로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자 예수님을 “나는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고, 세 번째에는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누가 더 나쁘고 누가 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매우 깊이 후회했습니다. 심히 통곡하면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후회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후 위대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차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베드로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낙심하여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매우 비참한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체험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고, 성령을 받으며, 오순절에 힘 있게 말씀을 전하여 많은 사람이 구원받고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바로 그 좌절의 경험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그릇으로 변화되어 가는 토대가 된 것입니다.


  반면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도 못했고,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하지도 못한 채 죄 가운데서 자신의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힘과 자신의 생각, 자신의 고집대로 살았으며, 하나님께 맡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를 향해 “친구여”라고 부르셨습니다.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의지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힘에 매달렸으며, 결국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유다의 모습에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죄의 문제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가는 것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변화되고, 용서받으며, 해방되어 갑니다. 참으로 예수님께 쓰임받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자신의 죄에 집착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다가 아니라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사랑의 시선 안에서 마음이 깨어지고 회개하며, 참된 사랑 안에서 성장해 갈 수 있는, 그런 베드로와 같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부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성장해 나아갑시다.

カテゴリー:

投稿日:2026年09月20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