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年07月1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7月1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23編 1~4節
〇讃 頌 讃頌歌 1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34 (詩編 81編 )
〇讃 頌 讃頌歌 569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5章 31~46節
〇説 教 「右の羊と左の山羊 (오른편의 양과 원편의 염소)」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84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7月 1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右の羊と左の山羊」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5章 31~46節
今日の聖書箇所では、終末の時にどのようなことが起こるかが記されています。
イエスさまは終末の時に再び来られて、審判の主として「裁きの座」に着かれます。そして、右に羊、左に山羊により分け、右の羊は神の国を受け継ぎ、左の山羊は「永遠の火」の中に放り込まれるというのが、今日の聖書箇所の話です。
私ははたして右の羊なのか、左の山羊なのか、ということが大きな分かれ道になるわけですね。ここで、羊は信仰者を表し、山羊は未信者を表すというような解釈もできますが、ここではそのような意味で使われているようには思いません。むしろ、私たちは羊にも山羊にもなれ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イエスさまはその裁きの座において、羊飼いが羊と山羊をより分けるように、私たちをより分けるということです。
そして、イエスさまが羊なのか、山羊なのかをより分ける時の決めてになるのが、「最も小さい者」に対し、何をしたのかということです。
ここには具体的として、「飢えている人に食べ物を与えた」「渇いている者に飲み物を与えた」「旅人に宿を貸した」「裸の人に着る物を与えた」「病人を見舞った」「牢にいる囚人を訪ねた」といったことが挙げられています。
ここに事例として挙げられた人々は、貧しい人、他所から来て困っている人、病人、囚人であり、自分のことを守れない人、しかも社会の人々から疎外され、忘れられているであって、何よりも助けが必要な人々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さまは「それらの人々にしたのはわたしにしたのだ」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
40節です。「はっきり言っておく。わたしの兄弟である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にしたのは、わたしにしてくれたことなのである。」
これは、具体的に「愛を実践し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が、ただ、ここで誤解してはいけないことは、この話が善い行いによる救いを説いてい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救いはあくまで、キリストの十字架の贖いの御業を信じる信仰に依ります。救いは100%恵みです。キリストが私たちを救うのであって、私たちの功績が私たちを救うのではありません。
この譬えにおいて、右の羊としてより分けられ、賞賛された人たちは、なぜか「わたしはそんなに褒められるようなことをした記憶はない」と驚いています。明らかに彼らは、報いを期待して、地獄の裁きから逃れようとして善い行いをし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彼らはキリストを信じる者として、キリストに従う正しい行動を自然に現しただけなのです。ただ純粋な動機でキリストの命令に従い、愛を示したのです。
ただ、この最も小さな者を助けるという行為には、自分が大きな犠牲を払う覚悟が必要です。イエスさまの愛を具体的に示すには、肉体的な犠牲、精神的な犠牲、霊的な犠牲、時間とエネルギーの犠牲などが必要です。
多くの場合、神さまの働きには犠牲が伴います。愛を表すのに犠牲が必要な時もあります。しかし、私たちはイエスさまがあなたのために大きな犠牲を払って愛を示されたように、私たちも犠牲を払ってでも、行動を通して、最も小さい者たちに愛を表す必要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イエスさまは「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マタイ22:39)と言われました。そして、今日の聖書箇所では「最も小さい者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
これは私たちにとって大きな課題です。でも、そこで少し見方を変えてみたらどうかと思うのです。この「最も小さい者」が、実はイエスさまだったら私たちの態度は変わるのではないしょうか?
イエスさまがあなたのドアをノックし、食べ物が欲しい、飲み物が欲しい、泊まらせて欲しい、服が欲しいと言われたらどうしますか?
皆さんはきっと、目の前にいる人が、はっきりと主イエス・キリストだと分かれば、誠心誠意仕えようとするでしょう。けれども、キリストはそんな現れ方はされません。「わたしの兄弟であるこの最も小さい者たちの一人」の背後に隠れておられるのです。
左の山羊により分けられてしまった人たちは、最も小さい者たちにすることはキリストにすることであると知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ながら、実は、右の羊に分けられた人たちも、この真理を知らなかったのです。
キリストに仕えたなんて知りません。知らなくとも、何も問題はありませんでした。彼らはただ純粋に、憐れみの心で仕えただけでした。キリストの御言葉を実行しただけです。そして、それを自分の手柄だとも何とも思っておりません。
彼らは主の羊たちであったのです。彼らは天の御国を受け継ぐのにふさわしい、永遠の命に入るのにふさわしい者たちでした。
皆さん、私たちの周りには助けが必要な人、支えが必要な人がたくさんいます。私たちは毎日、仕事に行ったり、買い物に行ったり、病院に行ったり忙しくしています。それが当たり前になってしまい、いつの間にか周りの人を気にすることさえも少なくなっている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はいつイエスさまに会ってもおかしくないのです。私は日々の生活の中で、神さまの愛を行動に移せなかった経験がたくさんあります。あの時、何故何も言わなかったのか?あの時、何故車を止めて人を助けなかったのか。あの時、何故手を伸ばさなかったのか。知らないふり、忙しいふりをして通りすぎてしまった経験が、皆さんにもあるかも知れません。
今は、電車の中や待ち時間でも、スマホの画面を見ている人が多くいます。それが悪い訳ではありませんが、それにより、色々な機会を逃していることも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私たちは、周りの人の存在がまるでないかのように振る舞ったり、自分を目立たなくして生きることが普通になっています。そんな時代だからこそ、私たちは今一度手を止めて、目をあげて、周りの状況を見渡すことも大切だと思います。人ともっと良い関係を築くことに時間やエネルギーを使ってみたり、助けが必要な人に連絡してみたり、もう一歩進んで、愛を表してみたり。どんな小さなことでも、行動に移すことで、大きな違いが生まれると思います。
裁きの日に、神さまの兄弟であるあなたの周りにいる人たち、一人一人がイエス・キリストであると意識して、その一人一人が神さまにとって尊い創造物であり、神さまの宝物であり、イエスさまがその人のために十字架の上で血を流されたことを考えますと、いつも下を見て、スマホを見ている場合では無いことが明らかですよね。電車に乗っている人。道で会う人。お店で会う人。教会の人。同僚。親戚。車で通り過ぎる人。
私たちもこの地上にて主の御心を行い、兄弟愛、隣人愛を通して、主に仕え、主の再臨の時に、主の羊として、神さまの御前に出たいと願います。
【2026년 7월 19일 주일예배(요약판)】
“오른편의 양과 왼편의 염소”
마태복음 25장 31~46절
오늘의 말씀은 마지막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 다시 오셔서 심판의 주로 심판의 자리에 앉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오른편의 양과 왼편의 염소로 나누십니다. 오른편의 양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고, 왼편의 염소는 ‘영원한 불’에 던져집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오른편의 양일까요, 아니면 왼편의 염소일까요? 이것이 매우 중요한 갈림길이 됩니다. 여기서 양은 믿는 사람, 염소는 믿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는 그런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누구나 양이 될 수도 있고 염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자리에서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 우리를 나누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는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구체적으로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가,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가, 나그네를 영접하였는가,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었는가, 병든 자를 돌보았는가, 옥에 갇힌 자를 찾아갔는가”가 제시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타지에서 와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 병든 사람, 죄수와 같이 스스로를 지킬 수 없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잊혀진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이 비유는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지, 우리의 공로나 업적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오른편의 양으로 구별되어 칭찬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는 기억이 없다며 놀랍니다. 그들은 상을 받기 위해, 혹은 지옥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순수한 동기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극히 작은 자를 돕는 일에는 때로 희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희생, 정신적인 희생, 영적인 희생, 시간과 에너지의 희생이 따르기도 합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일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희생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큰 희생을 치르시며 사랑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도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행동으로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큰 과제입니다. 그런데 조금 시각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만약 그 ‘지극히 작은 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면 우리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집 문을 두드리시며 “먹을 것이 필요하다. 마실 것이 필요하다. 하룻밤 묵게 해 달라. 입을 옷이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분명 여러분은 눈앞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안다면 정성을 다해 섬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모습 뒤에 자신을 감추고 계십니다.
왼편의 염소로 구별된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오른편의 양으로 구별된 사람들도 이 진리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섬겼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순수한 긍휼의 마음으로 섬겼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했을 뿐입니다. 또한 그것을 자신의 공로라고도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주님의 양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직장에 가고, 장을 보고, 병원에 가는 등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런 생활이 당연해지면서 어느새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예수님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저 역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왜 차를 세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지 못했을까? 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그냥 지나쳤을까 하는 후회가 있습니다.
요즘은 전철 안에서도,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들과 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연락해 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해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행동이라도 그것이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심판의 날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주변의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귀하게 창조하신 존재이며, 하나님의 보배이고,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철에서 만나는 사람, 길에서 스치는 사람, 가게에서 만나는 사람, 교회의 성도, 직장 동료, 친척, 그리고 차를 타고 지나치는 사람까지도 모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며 형제 사랑과 이웃 사랑을 통해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오른편의 양으로 인정받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앞에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