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年06月28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6月28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7編 6~8節
〇讃 頌 讃頌歌 10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30 (詩編67編 )
〇讃 頌 讃頌歌 250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3章 37~39節
〇説 教 「拒まれても、なお注がれる愛
(거절당해도 끝까지 베푸시는 사랑)」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19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6月 2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拒まれても、なお注がれる愛」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3章 37~39節
先週の聖書箇所(マタイによる福音書23章13~36節)では、イエスさまが当時の宗教指導者である律法学者やファリサイ派の人々に対し、「偽善者たちよ」という激しい言葉を繰り返しながら、七つの災いを宣告されました。それは彼らが形だけの信仰に走り、困窮している人々を助けず、神さまの御旨をねじ曲げていたからです。それはイエスさまの徹底的な裁きの言葉と言っても良いでしょう。
今日の聖書箇所である37節でも、イエスさまは「エルサレム、エルサレム、預言者たちを殺し、自分に遣わされた人々を石で打ち殺す者よ」(37節)と、イエスさまは当時の人々に激しく訴えかけておられます。
ただ、これは怒りの言葉ではありません。嘆きの言葉です。ここに、イエスさまの本当の思いが表れているのです。
エルサレムという町は、ユダヤの民にとって特別な場所でした。神殿のある都です。そして何より、神さまが何度も何度も預言者たちを遣わして、「わたしのもとに帰りなさい」と語りかけ続けてこられた町です。
しかし同時に、エルサレムはもう一つの歴史を持っています。神さまから遣わされた預言者たちが、繰り返し拒まれ、迫害され、命を落とした歴史です。イエスさまが「エルサレム、エルサレム」と名前を二度繰り返されるとき、その言葉には長い歴史の重みが込められています。一度や二度ではありません。何世紀にも渡って、エルサレムは神さまを繰り返しの拒絶したのです。
エルサレムは、神さまに最も愛されながら、最も神さまを拒み続けた場所でもありました。イエスさまは今、その数千年に渡る拒絶の歴史のすべてを、ご自分の肩に背負って嘆いておられます。
聖書では、名前を繰り返すのは、深い親しみと、それ以上に深い悲しみを表す表現です。これは断罪の宣告ではなく、愛する子を失おうとしている親の叫びです。直前まで「偽善者」と激しく叱責していたイエスさまの口から、今は震えるような悲しみの思いが溢れ出しています。
神さまの忍耐は、私たちの想像をはるかに超えています。神さまは、一人が拒まれてもまた次の一人を遣わし、愛を伝えようとし続けました。人々が耳を塞げば塞ぐほど、神さまはより強く語りかけられました。この言葉は、人類の罪深さと同時に、神さまの忍耐の長さを物語っています。そして、最後にお遣わしになったのが、ご自分の愛する独り子イエス・キリストでした。
イエスさまはこう言われています。「めん鳥が雛を羽の下に集めるように、わたしはお前の子らを何度集めようとしたことか。」(37節)
ここに、イエスさまの愛が示されています。母鳥が雛を外敵から覆い隠し、自分の身を盾にして守ろうとしています。神さまの愛は抽象的な理念ではありません。危険から守ろうとする具体的な愛です。
ある農家の鶏小屋に雷が落ちて火事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火はあっという間に燃え広がり鶏小屋は燃え落ちてしまいました。ほとんどの鶏が焼け死んでしまいましたが、焼け死んだめん鳥の下から数匹の雛が出てきました。めん鳥が雛たちを自らの翼の下に呼び寄せ、身を挺して、熱い炎から雛たちを守ったのでしょう。
主イエス・キリストも私たちのことを身を挺して守って下さいます。自らの命を投げ出しても私たちを火の裁きから守って下さるのです。そのような愛に満ちた神さま、救い主であられます。自分の翼の下にかくまってくださる方です。永遠の火、地獄の炎から私たちを守って下さるためにイエス・キリストは十字架にかかって死んで下さいました。そのようなイエス・キリストが、今も、ここにいる皆さんに救いの招きをしておられます。
「私の翼の下に逃げ込んで来なさい。避難しなさい。そこには安心がある。そこには平安がある。そこには希望がある。そこにはすべての必要があるんだ。」と、「死んでもなくならない命が、天国の希望がそこにはあるのだ。」と、おっしゃっておられます。
「だが、お前たちは応じようとしなかった。」(37節)
ここに悲劇があります。神さまは翼を広げられていますが、無理やり抱え込むことはなさいません。救いは招きであって、支配ではありません。
神さまの守りの翼を拒絶し続けた結果、何が起こるのでしょう。それは、神さまによる裁きというよりも、自分から神さまを追い出した後に残る「虚しさ」です。紀元70年、実際にエルサレム神殿は崩壊し、跡形もなくなりました。神さまの招きを拒むとき、そこは「空っぽの家」になってしまいます。
しかし、イエスさまの言葉は絶望で終わってはおりません。39節です。
「言っておくが、お前たちは、『主の名によって来られる方に、祝福があるように』と言うときまで、今から後、決してわたしを見ることがない。」(39節)
この言葉は詩編118編26節からの引用ですが、詩編118編はいつか再び、喜びをもって主を迎える日が来ることを指し示しています。完全な拒絶の先にも、なお将来への希望の扉がわずかに開かれている。これが、聖書が語る福音の深みです。神さまは、怒りで幕を閉じようとはされません。裁きの言葉の中にも、なお開かれた扉、救いの扉を残しておられます。
今日の御言葉は、まさに私たちに呼びかけられています。私たちは神さまの招きに応じているでしょうか。日々の忙しさや自分自身のプライドの影に隠れて、神さまの招きを後回しにしていないでしょうか。
しかし、それでも主は今も翼を広げておられます。礼拝に集うとき、聖書を読むとき、心の奥に静かに響く良心の声。そのすべてが、主の呼びかけかもしれません。
そしてもう一つ、この主の御姿は、私たちの生き方にも光を当ててくださっています。私たちも誰かを愛そうとしても拒まれることがあります。誠実に関わっても誤解されることがあります。そんなとき私たちは、すぐに心を閉ざしてしまいがちです。しかし主は、拒まれてもなお愛し続けられました。その愛はついに十字架へと向かいます。
そして、その拒絶されたはずの場所から「復活」という新しい命が始まりました。私たちの人生において、何かに拒まれ、見捨てられたと感じる瞬間があったとしても、それが人生の最後ではありません。愛は決して無駄に終わることはないのです。
皆さん、拒まれても、なお注がれる神さまの愛が、ここにあります。その愛の前に、心を開き、主イエス・キリストの愛の羽の下へ立ち帰ることを願います。
【2026년 6월 28일 주일예배(요약판)】
“거절당해도 끝까지 베푸시는 사랑”
마태복음 23장 37~39절
지난주 본문(마태복음 23장 13~36절)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며 일곱 가지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신앙에 빠져 있었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7절에 이르자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집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이 말씀은 분노의 외침이 아닙니다. 탄식의 외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마음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유대 백성에게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시며 “내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셨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루살렘은 또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거절하고 박해하며 죽여 온 역사입니다. 가장 큰 사랑을 받았지만 가장 끈질기게 하나님을 거절했던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이름을 두 번 부르실 때, 그 말씀에는 수백 년에 걸친 슬픔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한두 번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거듭 거절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거절의 역사를 자신의 마음에 품고 탄식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것은 깊은 사랑과 동시에 깊은 슬픔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정죄의 선언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버릴 것 같은 부모의 절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에서 예수님은 “시몬아,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후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다시 돌아와 믿음 안에 설 것을 믿고 사랑으로 부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은 거절당하면 또 다른 사람을 보내셨고, 계속해서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귀를 막을수록 하나님은 더욱 간절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보내신 마지막 분이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여기에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어미 새는 위험이 닥치면 자신의 몸으로 새끼들을 덮어 보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한 농가의 닭장에서 벼락으로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불은 순식간에 번졌고 대부분의 닭들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불에 타 죽은 암탉 아래에서 살아 있는 병아리 몇 마리가 발견되었습니다. 어미 닭이 자신의 날개 아래로 병아리들을 불러 모아 몸으로 지켜 주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지켜 주십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면서까지 심판의 불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영원한 멸망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늘도 살아 계신 주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 날개 아래로 피하라. 그곳에 평안이 있다. 그곳에 소망이 있다. 그곳에 네가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생명이 있고, 천국의 소망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 비극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날개를 펴고 계시지만 사람을 억지로 품지 않으십니다. 구원은 초청이지 강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거절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심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밀어낸 자리에 남게 되는 공허함입니다. 실제로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고, 그 영광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할 때 우리의 삶도 텅 빈 집처럼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39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너희가 이제부터 결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시편 118편 26절을 인용한 것으로, 언젠가 다시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을 가리킵니다. 완전한 거절의 끝에도 여전히 희망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깊이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으로만 끝내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구원의 문을 남겨 두십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바쁜 일상과 자존심 뒤에 숨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뒤로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날개를 펴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배 가운데, 성경 말씀 가운데, 그리고 양심 깊은 곳에 들려오는 조용한 음성 가운데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의 방식도 비추어 줍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려다가 거절당할 수 있습니다. 진심을 다했지만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절당하셨음에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침내 십자가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거절과 죽음의 자리에서 부활이라는 새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거절당하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절당해도 끝까지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그 사랑 앞에 마음을 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개 아래로 돌아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