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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年05月31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5月31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の手紙一(요한일서) 4章 19~21節
〇讃    頌    讃頌歌 3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37 (三位一体 )
〇讃    頌    讃頌歌 314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2章 34~46節
〇説   教    「神を愛するとは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18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5月 3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を愛するとは」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2章 34~46節


 今日の聖書箇所は、私たちの信仰生活において、最も根本的な姿勢を教えています。神さまを愛すること、そして、隣人を愛する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さまがこのことをお語りになったのは、律法の専門家が「律法の中で、どの掟が最も重要でしょうか」(36節)と質問したからです。しかも、この質問は、イエスさまを試そうとしてなされたものでした。


 この律法学者は、イエスさまが最初に最も重要な掟として語られた「心を尽くし、精神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しなさい」という申命記6章5節の御言葉は当然知っています。なぜなら、ユダヤ人たちはこの掟を心に刻み、いつも唱えていて、安息日の礼拝の中でも告白しておりました。ですから、誰もが知っている掟を、どうして律法学者がイエスさまに質問したかと言いますと、もし、イエスさまがこの掟以外の戒めを口にしたら、「誰もが知っている掟をなぜ軽んじるのか」と批難できますし、イエスさまがこの掟を言ったとしても、「お前は、なぜ、神殿で乱暴狼藉を働いたのか。お前は先祖たちが律法に基づいて作った伝統的慣習を守ろうとしない。それが神さまを愛する者のやることなのか」と批難できます。


 それに対し、イエスさまはこの第一の掟に続いて、彼らに攻撃する隙を与えずに、「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39節)と第二の戒めを語られました。この第二の掟はレビ記19章18節の引用です。そして、「律法全体と預言者は、この二つの掟に基づいている」(40節)とまで言われました。
 イエスさまに依れば、この第二の掟は第一の掟と切り離せません。第二の掟は第一の掟の意味を説き明かす掟ともなっているからです。


 神さまへの愛は、神さまの愛の対象である人々を、神さまが愛するように愛することで量られます。神さまへの愛は隣人愛で実証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ね。そのヒントとなる似たような表現がヨハネの手紙一の4章20節にあります。「『神を愛している』と言いながら兄弟を憎む者がいれば、それは偽り者です。目に見える兄弟を愛さない者に、目に見えない神を愛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Ⅰヨハネ 4:20)


 イエスさまは神さまへの愛をどのように表していたかと言いますと、盲人や足の悪い人や病人に癒やしの手を差し伸べられました。また、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が罪人として軽蔑していた徴税人や娼婦たちにも救いの手を差し伸べられました。さらに、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が敵として決して付き合わなかったサマリヤ人や異邦人にも救いの手を差し伸べられました。イエスさまはご自分の近くにいる人々を分け隔てなく愛されました。
 このようにして、イエスさまは隣人を「心を尽くし、精神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て」愛することを通して、神さまを愛しておられることを証明しておられたのです。


 当時のユダヤ人たちは、このレビ記19章18節の隣人愛に関する掟を当然知っています。隣人愛の大切さも分かっていました。しかし、彼らの「隣人」とは、自分の仲間とかユダヤ人同胞とかいった抽象的な観念で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彼らが隣人と考えるのは、自分がよく知っている存在であったり、自分が付き合うに相応しい人とか、自分の側に居ても不快ではない人といった、狭い概念でしか捉えられません。ましてや、罪人である徴税人や娼婦たち、そして異邦人を隣人として受け入れることなんて出来ません。


 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の大きな誤りは、この第一の掟と第二の掟を切り離して考えており、「隣人」の定義も非常にせばめてしまっていることでした。
 それに対し、イエスさまは40節で「律法全体と預言者は、この二つの掟に基づいている」と語られたように、聖書を要約すればこの二つの掟になり、神さまへの愛は神さまが愛される人々を愛することによって証明されると言われたのです。


 神さまへの愛と隣人への愛は決して切り離せない関係にあります。私たちが神さまを愛すると言うとき、それは直接的には隣人を愛す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職場の人たち、近所の人たち、側にいる人、見かけた人、その中には外国人たちもいるでしょう。勿論、その中には、性格の合わない人、宗教が違う人、価値観が合わない人、様々な人たちがいます。でも、隣人であることには違いありません。関係をもたないほうが楽で良いという本音に打ち勝た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このように、神さまへの愛は隣人愛によって量られるわけですが、神さまへの愛を量るものが、実はもう一つあります。それは、主イエス・キリストへの服従です。そのことが41~46節で教えられている内容です。


 イエスさまは時を改めて、ご自分から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に尋ねられました。「あなたたちはメシアのことをどう思うか。だれの子だろうか。」(42節)
 イエスさまはここで、キリストと呼ばれるメシヤの素性、本性、メシヤは人間の子か神の子かという、人格の正体を問題にしています。


 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は「ダビデの子です」(42節)と答えています。つまり、「ダビデ王という人間の子孫です」という答えです。確かにキリストはダビデの子孫であることに間違いありません。旧約聖書にも預言されています。
 しかし、キリストの人格の正体について、イエスさまは詩編110編1節を引用して、ダビデ王がキリストを「わたしの主」と呼んでいる事実を突きつけます(43-45節)。
 ここで「主」とは「神」という意味ですから、ダビデ王が「わたしの主」と呼んだキリストの人格は主なる神ということです。キリストが主なる神であるならば、「心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精神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しなさい」というその主とは、イエス・キリストのことになります。イエス・キリストは主なる神として、愛の対象なのです。
 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は、イエスさまに対して敵意むき出しで、この頃はすでに殺人計画まで練っておりました。彼らは隣人を愛していないだけではなく、主なる神さまをも愛していないことを証明していたのです。


 皆さん、「神を愛する」とは、隣人を、兄弟姉妹を愛することです。神さまを愛する証明として、礼拝を献げ、献金し、奉仕するだけでは不十分です。勿論、このことは大変重要なことなのですが、それは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も実践していました。もっと具体的な実践として、神さまを愛するとは、隣人を愛することなのです。


 そして、それはイエス・キリストへの服従によって証明されます。仮に、隣人愛を実践し、その人が神の名を口にしたとしても、イエス・キリストに無関心であったり、従う意志がないならば、その愛はニセモノでしょう。神さまへの愛は、隣人とイエス・キリストに対する態度によって実証されるのです。
 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に従い、真に神さまを愛し、隣人を愛する者たちでありたいと願います。


【2026년 5월 31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마태복음 22장 34~46절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근본적인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율법교사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36절)라고 질문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질문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로 던져진 것이었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먼저 말씀하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늘 암송했으며, 안식일 예배에서도 고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율법교사가 굳이 예수님께 질문했을까요? 만일 예수님께서 이 계명 외에 다른 계명을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면 “모두가 알고 있는 계명을 왜 가볍게 여기느냐”라고 비난할 수 있었고, 반대로 이 계명을 말씀하신다 해도 “당신은 왜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켰느냐. 왜 조상들이 율법에 따라 세운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냐”라고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계명에 이어 그들에게 공격할 틈을 주지 않으시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39절)는 두 번째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의 인용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40절)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이 두 번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계명이 첫 번째 계명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으로 측정됩니다. 즉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요한일서 4장 20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한일서 4:20)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들, 병든 사람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이 죄인으로 멸시하던 세리와 창기들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베푸셨습니다. 더 나아가 바리새인들이 원수처럼 여기며 가까이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게까지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심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레위기 19장 18절의 이웃 사랑 계명을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 중요성 또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이웃”이란 자기 동족이나 자기 편 사람들을 가리키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이 잘 아는 사람, 함께 지내기에 편한 사람, 자기 곁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 정도로만 이웃을 제한해서 생각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죄인으로 여겼던 세리나 창기들, 그리고 이방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가장 큰 잘못은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분리해서 생각한 것이며, 동시에 “이웃”의 의미를 매우 좁게 만들어 버린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40절에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성경 전체를 요약하면 이 두 계명이며,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증명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직장의 사람들, 이웃 사람들, 곁에 있는 사람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외국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 종교가 다른 사람, 가치관이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우리의 이웃입니다.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더 편하고 쉽다는 마음을 우리는 이겨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측정되는데, 사실 하나님 사랑을 판단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입니다. 이것이 41~46절에서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직접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42절)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메시아의 본질, 곧 메시아가 단순한 인간의 아들인지 하나님의 아들인지 그 정체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42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도 예언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시며 다윗이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43~45절). 여기서 “주”는 곧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내 주”라고 부른 그리스도의 본질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 하나님이시라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에서 말씀하는 그 “주”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적대감을 품고 있었고, 이미 예수님을 죽일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과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로 예배를 드리고 헌금하며 봉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들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역시 그런 일들은 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설령 어떤 사람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입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 무관심하거나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랑은 거짓된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태도를 통해 증명됩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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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6年05月31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