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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年01月04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1月4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11章 1~2節
〇讃    頌    讃頌歌 8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93 (新年 [1] )
〇讃    頌    讃頌歌 554
〇聖書奉読    ルカによる福音書 (누가복음)
         2章 41~52節
〇説   教    「イエスの言葉の意味が分からなかった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42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1月 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イエスの言葉の意味が分からなかった」
               ルカによる福音書 2章 41~52節


 イエスさまが12歳となり、その年の過越祭にも両親はイエスさまを連れてエルサレム神殿へ巡礼の旅に出ました。ナザレからエルサレムまでは120㎞ぐらいの距離ですから3~4日の道のりです。ユダヤ暦でニサンの月の14日に神殿で小羊をほふり、夕方に食べ、それから1週間過ごし、そして帰路につきます。この時、事件が起こりました。
 「祭りの期間が終わって帰路についたとき、少年イエスはエルサレムに残っておられたが、両親はそれに気づかなかった。イエスが道連れの中にいるものと思い、一日分の道のりを行ってしまい、それから、親類や知人の間を捜し回ったが、見つからなかったので、捜しながらエルサレムに引き返した。」(43-45節)


 ヨセフとマリアは我が子がいないと気づいたときは、相当慌てたことでしょう。何かの事件に巻き込まれたのか、誘拐されたのかと、顔が青くなったはずです。エルサレムには、ナザレからの一行だけでなく、他の村々からも上って来ていたわけですから、捜すのは大変であったはずです。親族、知人の中も捜しました。そして、とうとうエルサレムに引き返すはめになったのです。もしや、まだ神殿に残っているのではと神殿に戻ったわけですね。両親が帰路についてから、もう三日も経っていました。


 神殿に入ってみると、イエスさまは律法の教師たちに囲まれて問答をしておりました。その姿はエルサレムに一人残されて不安そうにしていたとか、そういうもの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落ち着いた表情で大人たちと対話していて、大人たちの方が驚きの表情を見せているという具合です。
 47節に「聞いている人は皆、イエスの賢い受け答えに驚いていた」とあります。律法の教師たちが「この少年はふつうの子ではない。12歳でなぜこれほどまでに律法に精通しているのか」と、イエスさまの知恵に驚いていたのです。
 イザヤ書11章1~2節に「エッサイの株からひとつの芽が萌えいで、その芽からひとつの若枝が育ち、その上に主の霊がとどまる。知恵と識別の霊、思慮と勇気の霊、主を知り、畏れ敬う霊」とありますが、まさに12歳のイエスさまはすでにメシアの片鱗を見せておられたのです。


 この教師たちの驚きに続いて、今度は両親たちが驚きます。ルカによる福音書にはこの「驚く」という表現がよく使われます。実際、マリアとヨセフは、我が子に驚かされっぱなしだったのでしょう。マリアは思わず「なぜこんなことをしてくれたのです。御覧なさい。お父さんもわたしも心配して捜していたのです」(48節)と言いました。
 しかし、イエスさまは両親の驚きに対して、いたって冷静にこう答えています。「どうしてわたしを捜したのですか。わたしが自分の父の家にいるのは当たり前だということを、知らなかったのですか。」(49節)
 この「父の家」とは、勿論、神殿のことですが、それ以上にイエスさまがおっしゃりたいことは、「わたしはいつも父なる神さまと共にい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12歳のイエスさまには、すでに「わたしは天の父なる神さまの子どもである」という絶対的な認識があったのです。この「わたしは天の父なる神さまの子どもである」という認識は、私たち信仰者にとっても、絶対的に必要なことなのです。


 イエスさまは30歳からの公生涯に入られてからも天の神さまをと認識し、そう呼んで歩まれております。信仰者も同じです。肉の父親がいると同時に、天の神さまを父なる神さまと呼んで歩むわけです。
 イエスさまは、ヨハネからバプテスマを受けた時に、「あなた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適う者」という天の声を聞きました(ルカ3章22節)。私たちも、この声を心の耳で聞いて、心に安定感をもって歩んでいくのです。12歳の少年とは思えないイエスさまの心の安定感は、父なる神さまの中にいるという確かな意識から来ておりました。
 私たちが無用な恐怖感や孤独感を抱いたり、人の非難にさらされて沈んだりする時、この自分が神の子であるという認識、天の父なる神さまの中にいるということを思い起こして、落ち着くべきです。


 そして、この少年イエスの姿から気づくもう一つのことは、成人年齢に達する頃に、肉の両親から精神的に自立し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さまは天の父なる神さまに心をしっかりと結びつけておられました。それは、親から精神的に自立していたと言えます。ただ、それは単に親離れ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51節に「それから、イエスは一緒に下って行き、ナザレに帰り、両親に仕えてお暮らしになった」とありますように、「わたしにとって父なる神が真の親だ」という自覚を持ちつつも、肉の両親に仕えられました。


 それから52節には、結びの言葉として、「イエスは知恵が増し、神と人とに愛された」とあります。それは、イエスさまが人間として、実際の生活の中で、主なる神さまを畏れ敬う生活をしながら、主なる神さまに従う生活を学習していったということでしょう。


 それから最後に、50節の「しかし、両親にはイエスの言葉の意味が分からなかった」という御言葉に焦点を当てて終わりたいと思います。
 両親は天使ガブリエルから「この子は自分の民を救う」(マタイ1章21節)、「インマヌエルと呼ばれる」(マタイ1章22節)、「生まれる子は聖なる者、神の子と呼ばれる」(ルカ1章35節)と啓示を受けていました。ですから、この両親はイエスさまの言動を理解しなければならない立場にありました。それなのにイエスさまの言動を理解出来なかったのです。


 それは、この両親だけのこと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の弟子たちも同じでした。「十二人はこれらのことが何も分からなかった。彼らにはこの言葉の意味が隠されていて、イエスの言われたことが理解出来なかったである」(ルカ18章34節)。弟子たちは主イエスの口から直接、受難と復活の預言を聞きましたが、さっぱりわからなかったようです。
 マリアもこの時理解出来ませんでしたが、51節後半にありますように「母はこれらのことをすべて心に納めていた」と、心に留めておくことにしました。そして、やがて理解するに至ったのでしょう。それまでどのくらいの年月を要したのかは分かりません。


 私たちも同じような過程を踏んで行くのかもしれません。クリスチャンになったとしても理解できないどころです。ずっと後になって、御言葉のとんだ受け止め違いをしていたことに気づくことがあります。また、えっ、ここにこんなすばらしい御言葉があったんだと、今更ながら新鮮に受け止めさせられるということも良く起きます。
 私たちは誰でも学習途上であると言えます。だからこそ、御言葉をもっと理解したいという情熱を持ち続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


 皆さん、今年一年、聖書の御言葉をもっと理解したいという情熱をもって、聖書の御言葉読み、礼拝に集いたいと願います。そして、少しずつ理解する者となって、主イエス・キリストと目と目を合わせたいと願います。


【2026년 1월 4일 주일예배(요약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누가복음 2장 41~52절


  예수께서 열두 살이 되셨을 때, 그 해의 유월절에도 부모는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120킬로미터로, 사흘에서 나흘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유대력 니산월 열나흗날, 성전에서 어린 양을 잡아 유월절 식사를 한 후, 일주일 동안 이어지는 절기를 지내고 나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귀로 길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나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43-45절)


  요셉과 마리아는 자기 자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크게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혹시 어떤 사건에 휘말린 것은 아닌지, 유괴를 당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며 얼굴이 사색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예루살렘에는 나사렛에서 온 일행뿐 아니라 여러 마을에서 올라온 순례자들이 있었으므로, 아이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친족과 지인들 가운데서 아이를 찾았고,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시 아직 성전에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성전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부모가 귀로에 오른 지 이미 사흘이 지난 뒤였습니다.


  성전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 앉아 질문하고 대답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은 예루살렘에 홀로 남겨져 불안해하는 소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차분한 얼굴로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고, 놀라는 쪽은 오히려 어른들이었습니다.
  47절에는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 교사들은 “이 소년이 어찌하여 열두 살의 나이에 이처럼 율법에 정통할 수 있는가” 하며 예수님의 지혜에 깊이 놀랐던 것입니다.
  이사야서 11장 1~2절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열두 살의 예수님은 이미 메시아의 단면을 드러내 보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율법 교사들의 놀라움에 이어, 이번에는 부모가 놀라게 됩니다. 누가복음에는 이처럼 ‘놀라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실제로 마리아와 요셉은 자녀로 인해 계속해서 놀라움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만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모의 놀라움에 대하여 매우 침착하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의 집’은 물론 성전을 가리키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의미는 “나는 언제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선언입니다. 열두 살의 예수님에게는 이미 “나는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절대적인 자기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인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에 공생애에 들어가신 이후에도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며 그렇게 부르시며 사셨습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두고 살아가면서 동시에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눅 3:22). 우리 또한 이 음성을 마음의 귀로 듣고, 마음의 안정감을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열두 살의 소년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예수님의 깊은 안정감은,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확고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쓸데없는 두려움이나 고독감에 사로잡히거나,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마음이 무너질 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소년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미 성인에 이르기 전부터 육신의 부모로부터 정신적으로 자립해 계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께 마음을 굳게 연결하고 계셨습니다. 이는 부모로부터의 정신적 자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나 거리 두기가 아니었습니다. 51절에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기록된 것처럼, 참된 아버지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며 섬기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52절은 이 단락을 마무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는 예수님께서 참 인간으로서 실제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배워 가셨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50절의 말씀,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는 구절에 주목하며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는 계시를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이해해야 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요셉과 마리아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4). 제자들은 예수님의 입으로 직접 수난과 부활의 예고를 들었음에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마리아 역시 이때에는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51절 하반절에 기록된 대로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었다”고 하여,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해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이와 같은 과정을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곧바로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말씀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며 자신이 크게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여기에 이런 놀라운 말씀이 있었는가” 하고 새롭게 감동받는 일도 자주 일어납니다.
  우리는 모두 배움의 길 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는 성경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읽으며 예배의 자리로 함께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조금씩 깨달아 가는 자가 되어, 마침내 주 예수 그리스도와 눈과 눈을 마주하는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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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6年01月04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