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10月12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10月12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ミカ書(미가) 4章 2節
〇讃 頌 讃頌歌 33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63 (詩編145編 )
〇讃 頌 讃頌歌 539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5章 21~28節
〇説 教 「カナン人女性の信仰 (가나안인 여성의 믿음)」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42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10月 1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カナン人女性の信仰」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5章 21~28節
今日の聖書箇所は、汚れた霊に取りつかれた娘を持つカナン人の異邦人女性が、イエスさまのことを聴き、駆けつけてきて、「主よ、ダビデの子よ、わたしを憐れんでください。娘が悪霊にひどく苦しめられています」(22節)とお願いしたという話ですね。
「悪霊にひどく苦しめられている」というのは、当時の医学では治せない、または、原因が分からない病気にかかっていて、時には、癲癇のような発作を起こして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娘を治して欲しい、とイエスさまにすがっているわけですね。それなのに、イエスさまは、最初「わたしはイスラエルの家の失われた羊のところにしか遣わされていない」と答えられます。
それでもカナン人女性がしつこく「主よ、どうかお助けください」(25節)とお願いすると、今度は「子どもたちのパンを取って小犬にやってはならない」(26節)と、この母親の懇願を拒絶されるのです。
私たちが知るイエスさまとは少し違います。いつものイエスさまだったら、この母親と娘を深く憐れみ、慰めの言葉をかけ、癒やされるはずです。でも、イエスさまは冷たくあしらわれました。
その理由は、あなたがたは「自分の子どもではない」「小犬」だということです。わかりやすく言えば、「もしあなたがユダヤ人であれば『子ども』として助けてあげるけど、あなたはカナン人でシリア・フェニキア出身の異邦人という小犬であり、私とは関係がない。だから、あなたの娘には癒しの業を行わない、と。まるでイエスさまが人種差別をしているかのような印象を受けます。
「イエスさま、いったいどうしちゃったの?」という感じです。他の聖書個所では、異邦人であろうとも罪人であろうとも、求める人には応えようとするイエスさまが、何故、この時、このような対応をされたのでしょうか。
確かに、以前、イエスさまは12弟子たちを派遣する時、「異邦人の道に行ってはならない。サマリア人の町に入ってはならない。むしろイスラエルの家の失われた羊のところに行きなさい」(マタイ10:5-6)と、言われていますから、イエスさまの福音宣教がユダヤ人に優先順位があったのは、確かにあります。
しかしながら、今回は21節を見ますと、イエスさま自らティルスとシドンという町に行かれているのです。ティルスとシドンというのは、まぎれもない異邦人の町であり、今日登場する女性はそこの町の出身のカナン人でした。イエスさま自らそんな町に来たのですから、いくら異邦人であろうとそこにいる人々に福音を伝え、癒やしの業を行うはずだと思うのです。でも、イエスさまはそれを拒絶されたのです。
なぜ、イエスさまはそのような態度であったのかを考える必要があります。それは、先週の聖書箇所の内容に原因があるようです。先週の聖書箇所(マタイ15章1~20節)には、「神の戒め」よりも「人間の戒め」を重んじるファリサイ派の人々との論争がありました。「口に入るものは人を汚さず、口から出て来るものが人を汚すのである」(マタイ15:11)と人々に語りかけても、弟子たちさえ理解できないのを見て、イエスさまは、落胆しておられます。肉体的な疲れもあったのでしょうが、それより誰も理解してくれない空しさにさいなまれていたのかも知れません。もうこの人たちを相手にするなんてやっていられない。そのような思いから、イエスさまは人々から離れ、一人になりたいと思われたのでしょう。
私たちもとそう思うことがあります。そういう時、心は疲れ、本当はそういう対応をしてはいけないと思いつつも、相手に対してイラついてしまい、過敏に反応してしまうことがあ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もしかしてイエスさまもそのようなデリケートな精神状態であ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ところが、そこにカナン人で、フェニキア出身という何やら複雑そうな背景を持つ女性がやってきました。自分は誰にも知られたくない、誰にも会いたくないと思っているのに、勝手にやってきたわけですね。そういう時にふとこういう言葉が出てしま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うのです。イエスさまはそんな感情を持つはずがないというのは、私たちの勝手な思い違いです。イエスさまも一人の人間です。人間的な弱さを当然持っておられました。
ところが、そんなイエスさまの心を包み込んだのが、この女性の受け答えでした。「主よ、ごもっともです。しかし、小犬も主人の食卓から落ちるパン屑はいただくのです」(27節)。
これはすごい言葉だと思います。「失礼な、私は犬なんかじゃありません!」と言い返したいところです。でも、彼女はイエスさまの言葉をそのまま受け止め、さらに謙遜な態度で、イエスさまの癒やしを求めて、イエスさまにすがります。
それだけ、彼女の思いは必死だったのだと思います。自分の娘を癒やすことが出来るのは、いえ、自分を救ってくださるのは、イエスさましかいないと、ひたすらイエスさまにしがみつこうとしました。
当時の世の中は、恐らく女性が男性に物申すことも、しかも民族の違う男性のところに出かけて行ってひれ伏すなんてことは出来ないことです。しかし、彼女は、自分が弱い立場であることを否定せず、むしろ小犬のように憐れみに寄りすがる他ない存在だということを受け入れた上で、イエスさまに憐れみを乞うているのです。彼女は決して諦めません。異邦人の自分をもその深い憐れみによって必ず救ってくださると疑わないのです。
イエスさまはびっくりしたと思います。そして、それ以上、何も言えなくなってしまいました。イエスさまはご自身の中にあった、疲れ、喪失感、色々な思いが抜き去られ、「婦人よ、あなたの信仰は立派だ。あなたの願いどおりになるように」(28節)と、まさに我に返ったかのように語りかけています。異邦人である彼女の信仰が、イエスさまを本来のイエスさまへと立ち返らせたと言っても良いかもしれません。彼女の娘はそのときそこにはいませんでしたが、イエスさまのこの言葉が与えられた時、彼女の娘は癒されました。
私たちがここで着目すべきことは、この異邦人女性の信仰、決して諦めない信仰ということもありますが、それ以上に、この時のイエスさまの態度、考え方なのです。
どういうことかと言いますと、先ほど、イエスさまも一人の人間として弱さを持っておられたと言いましたが、イエスさまは真の神でありながら真の人として生まれました。それは、イエスさまもまた最初から完璧な存在として天から下って来たのではなく、赤ちゃんとして生まれ、ユダヤ人の家庭や人々との交わりの中で色々なことを教えられながら育ってきたわけですね。当然、ユダヤ人社会の中にあった、差別・偏見といったものに当然影響を受けておられるわけです。少なくともユダヤ優先主義の考えはあったと思います。
イエスさまにもある種の偏見があったわけです。それが、この諦めない異邦人女性との出会いによって、イエスさまも変えられていったということな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真の神であり、真の人でもあります。それは弱さを持っている人間でありつつ、新たな気付きが与えられた時にはしっかりと向き合って、方向転換、いわゆる悔い改めをなさるということです。
皆さん、この物語は、イエスさまも日々の営みの中で、人々の交わりの中で、また神さまとの対話の中で変えられ、成長されたように、私たちもまた出会いによって変えられること、新しい者とされていくことが示されているように思います。
自分自身、信仰にしろ、考えにしろ、それを固定化するのではなく、或いは正当化するのではなくて、常に、変えられていくことが必要なのではないのでしょうか。
神の国の福音は、このカナン人女性のような信仰を持つ人々によって、異邦人の世界へと拡大していったのです。神の国というのは、新たな気づきが与えられ、立ち返ることからさらに広がっていくのです。
私たちもまた、イエス・キリストとの出会いによって日々新しく変えられ、祈りつつ歩んでまいりましょう。そこに神の国の奇跡が起こるのだと、カナン人女性の信仰を通して教えられたいと願います。
【2025년 10월 12일 주일예배(요약판)】
“가나안인 여성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28절
오늘의 성경 본문은 더러운 귀신이 들린 딸을 둔 가나안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22절)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여인이 말한 “흉악하게 귀신 들렸다”는 표현은 당시로서는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고,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 때로는 간질과 같은 발작 증상을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딸을 고쳐달라고, 이 어머니는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처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 이 말은, 이 여인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주여 저를 도우소서”(25절)하고 매달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6절)
우리가 알고 있는 자비롭고 따뜻한 예수님의 모습과는 다소 다릅니다. 평소의 예수님이라면 이 어머니와 딸을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의 말을 건네며 치유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차갑게 대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는 당신들은 “자신의 자녀가 아닌 개”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만약 당신이 유대인이라면 내 자녀로서 도와주겠지만 당신은 가나안인이고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방인이라는 개들이며 나와는 관계가 없다. 그래서 당신의 딸에게는 치유하지 않겠다고. 마치 예수님이 인종차별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예수님, 도대체 왜 그러신 걸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다른 성경 부분에서는 이방인이든 죄인이든 원하는 사람에게는 부응하시려는 예수님이 왜 이때 이런 대응을 하셨을까요?
확실히 예전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파견할 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태 10:5-6)고 하셨으니,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는 분명히 유대인을 우선으로 하는 우선순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친히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21절). 두로와 시돈 지방은 틀림없는 이방인의 마을이었고, 오늘 등장하는 여성은 그곳 마을 출신의 가나안인이었습니다. 그런 이방인의 땅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고쳐주지 않으셨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합니다.
왜 예수님은 그런 태도였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주 성경 부분의 내용에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 성경 부분(마태 15장 1~20절)에는 “하나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계명”을 중시하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마태 15:11)라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도 제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낙담하고 계십니다. 육체적인 피로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공허함에 시달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을 떠나 잠시 혼자 있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지치고, 사실은 그런 대응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누군가에게 짜증을 내고, 감정적으로 과민하게 반응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혹시 예수님도 이때 그런 연약한 인간적인 상태에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방 여인 한사람이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아무에게도 알려지고 싶지 않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여인이 마음대로 찾아와 간절히 매달린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무심코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는 말이 나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감정을 가질 리 없다는 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착각입니다. 예수님도 한 사람의 인간입니다. 인간적인 나약함을 당연히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감싸준 것이 이 여자의 화답이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이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보통 같으면 “제가 어찌 개입니까!” 라고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더욱 겸손한 태도로 그분에게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만큼 그녀는 절박했습니다. 자신과 딸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고 믿었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사회에서는 여성이 남성에게, 더구나 다른 민족의 남성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약한 입장임을 부정하지 않고, 자비를 구하는 작은 존재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믿음은 참으로 깊고 강했습니다. 이방인인 자신도 그 깊은 연민으로 반드시 구원해 주시리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 그 말씀과 동시에, 멀리 떨어져 있던 그녀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지 가나안 여성의 끈질긴 믿음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만남을 통해 예수님 자신도 변화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참 사람이셨습니다. 즉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배우셨으며, 유대 사회의 문화와 생각속에서 자라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 우선주의적 사고를 접하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이방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 예수님은 그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지만 참 사람이시기에 새로운 깨달음이 주어질 때 그것을 겸손히 받아들이시고 방향을 바꾸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모범,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새롭게 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도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제를 통해 변화되고 성장하셨듯이, 우리 역시 만남을 통해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신앙을 고정시키거나 정당화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새로워질 수 있는 마음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변화와 깨달음을 통해 넓어집니다. 이방 여인의 믿음으로 복음이 이방 세계로 확장되었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속에서 새롭게 변화되며, 기도와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에도 하나님의 나라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본받으며, 우리도 날마다 주님 안에서 새롭게 되어가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