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04月27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4月27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Ⅱコリント(고린도후서) 5章 20~21節
〇讃 頌 讃頌歌 3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9 (詩編32編 )
〇讃 頌 讃頌歌 539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0章 1~15節
〇説 教 「主に遣わされて
(목주님께 파견되어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9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4月 27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主に遣わされて」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0章 1~15節
イエスさまは12人の弟子たちを呼び寄せ、汚れた霊に対する権能をお授けになりました。その12人の名前が2~4節に列挙されています。この12人の顔ぶれを見ますと、すべての者が同じように聖書でよく知られている訳ではありません。バルトロマイやタダイは、この聖書箇所にしか登場せず、後に成立した教会の伝承に少し出てくるだけです。イエスさまが選ばれた12人というのは、漁師をしていた者や徴税人だった者、また、過激派の熱心党だった者も、そして、名もない者たちでした。ですから、この弟子たちは、特別な地位や才能が買われて選ばれたものではなく、ただキリストが召してくださったからこそ成り立つ奉仕者集団であったわけです。そして、最後のイスカリオテのユダは、銀貨30枚と引き換えにイエスさまをユダヤ当局に引き渡す裏切り者です。
なぜ、このような者たちが選ばれたのか、真に、神さまの選びは不思議です。ただ、言えますことは、神さまが求めている人というのは、自分の力に頼らず、空っぽになって神さまの力を求め、自分にではなく神さまに栄光と手柄を帰す人であるのでしょう。
イエスさまはこのような12人の弟子たちを選び、派遣するわけですが、その際に5節からの言葉を命じられております。このイエスさまの言葉は今日の教会でそのまま実践でき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当時のイスラエルの状況だとか、何よりも弟子たちを訓練するためのものであったことを考慮する必要があります。それでも、今日の教会における宣教の業においても重要なことを教えているので、それを読み取っ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まず、イエスさまは「異邦人の道に行ってはならない。また、サマリア人の町に入ってはならない」(5節)と言います。それは、弟子たちを遣わす領域をイスラエルに限定したのです。弟子たちは訓練され、主の十字架と復活を体験し、やがて、世界宣教へと遣わされますが、この時点ではイスラエルのみの宣教です。それは、まだ訓練の初期段階ということもありますが、イエスさまにとっての宣教対象は、「失われた羊」(6節)とイエスさまが呼んでいるイスラエルの民たちであったのです。神さまの祝福のもとにあるはずのイスラエルの民たちが羊飼いを見失い弱り果てている。それを何とかしなければと「深く憐れまれた」(9:36)のです。
そして、宣教の具体的な任務は、「天の国は近づいたと宣べ伝える」ことと「癒やす」ことでした。これはどちらも、イエスさま御自身がなさってきたことです。8節に並べられた、「いやし」「生き返らせ」「清め」「追い払う」という働きは、イエスさまがなさったの奇跡そのものです。弟子たちの働きは、イエスさまの働きと全く同じです。
弟子たちがなぜ突然イエスさまと同じようなことが出来るようになったのでしょうか。疑問に残ります。そこは余り余計なことは考えない方が良いでしょう。1節にある「(イエスさまの)権能をお授け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弟子たちの能力や努力ではなく、恵みとして主の権能を持つよう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それは誰もが与えられるものではないのでしょうが、ここで重要なのは、これらの働きがどれも人を助ける愛の行いとな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これは今の教会もそうです。福音を伝えることと、愛の行い、この二つが福音宣教の両輪として機能することが重要なのです。
それから、9~11節では、宣教旅行にあって、シンプルライフを生きるように言われています。物を持つことを禁じているようにも思えます。病人を癒やしたりしても金銭を受け取ってはいけないと言います。どうやって生きていけば良いのか心配になりますが、このシンプルライフは自分たちが神さまによって養われる存在だと自覚する良い訓練となります。「日用の糧を今日もお与えください」と真剣に祈ることになり、弟子たちにとってはより実践的な訓練になるわけですね。8節の「ただで受けたのだから、ただで与えなさい」というのは、自分が受けた恵みによってなされた業のことです。「いやし」とか「清め」の業によって代価を求めては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す。自分の労働に対する代価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
イエスさまは、そのことを実践する上で、より具体的な方法を11~15節で言われています。宣教旅行は誰か助ける人がいなくては成り立ちません。泊まるところや食事を提供してくれる人が必要ですから、それにふさわしい人は誰かよく調べなさいと言います。それは福音を伝えることもそうです。その人が福音を語るに相応しいのか、きちんと聞く人のところにとどまって、そこで福音を語り、愛の業をなしていくということです。
そして、その家では「平和があるように」と挨拶しなさいと言います。シャロームですね。シャロームというのは、祝福の言葉です。その家の平和を祈る。祝福を祈る。宣教の業というのは、キリストの平和、祝福を与えることです。それが神さまからのギフトであります。
それで、もし、その家の者が拒むなら、祝福を祈ったその祝福は、空しく消え去るのではなくて、祈った者に帰ってくると言います。だから、宣教の業は、空しいもので終わることはないというのです。
ペトロの手紙第一の3章9節に「悪をもって悪に、侮辱をもって侮辱に報いてはなりません。かえって祝福を祈りなさい。祝福を受け継ぐためにあなたがたは召されたのです」(Ⅰペトロ3:9)とあります。私たちは誰かを裁いたり、呪ったりするのではありません。祝福を祈るのです。それが私たちが祝福を受け継ぐためには必要なことなのです。
最後に14節の「足の埃を払い落とす」ということを考えてみたいと思います。
「足の埃を払い落とす」という行為は、ユダヤ人たちが異邦人の地から聖地イスラエルに戻ったときに、異教の地の土が入ってしまわないように、足のちりを払い落としましたた。けれども、イエスさまはそんなことを言っている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にイスラエルの民たちに宣教するように指示しています。ですから、これは、福音を拒んだら、あなたがたは御国の外側に置かれます、というしるしなのです。御国の民とされるかどうかというのはユダヤ人か異邦人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福音への態度によって、御国の民となり得るのかが決まる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さまはそれをここで明確にしており、しかも、神さまによって滅ぼされたソドムとゴモラの町よりも厳しい裁きがなされることを強調しています。
それでは、私たちの福音に対する態度というのは、どうでしょうか。礼拝の招きの言葉として第二コリント5章20~21節を朗読しました。「ですから、神がわたしたちを通して勧めておられるので、わたしたちはキリストの使者の努めを果たしています。キリストに代わってお願いします。神と和解させていただきなさい。罪と何のかかわりのない方によって、神の義を得ることができたのです。」(Ⅱコリント5:20-21)
私たちの代わりに罪とされたキリストを、私の罪からの救い主として信じ受け入れるなら、私たちの罪は赦され、義とされます。何の罪も犯していないキリストの義が私たちに与えられ、神さまと和解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これが福音です。
皆さん、どうか、キリストを私の罪からの救い主と信じ受け入れて平安を得て下さい。そして、すでに信じ受けいれておられる方は、パウロが言っているように、「キリストの使者」として、キリストに遣わされた所で、忍耐と寛容と柔和さをもって、福音を伝えていきましょう。
【2025년 4월 27일 주일예배(요약판)】
“주님께 파견되어서” 마태복음 10장 1~15절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두 명의 이름이 2절부터 4절에 걸쳐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열두 사람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 성경에서 똑같이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돌로매나 다대오 같은 인물들은 이 성경 구절에서만 등장하고, 이후 형성된 교회의 전승에 잠깐 언급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사람은 어부였던 이들, 세리였던 이들, 또 과격파였던 열심당 출신도 있었으며,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제자들은 특별한 지위나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성립된 봉사자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는 은화 서른 닢과 맞바꾸어 예수님을 유대 당국에 넘긴 배신자입니다.
왜 이와 같은 자들이 선택되었는지 하나님의 선택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사람은 자기 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비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과 공을 돌리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파견하시면서 5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을 명령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서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과, 무엇보다도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선교 사역을 행할 때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으므로 이를 함께 읽어 가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보내는 영역을 이스라엘로 한정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훈련을 받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뒤에, 결국에는 세계 선교로 파견되는데, 이 시점에서는 이스라엘에 국한된 선교입니다. 그것은 아직 훈련의 초기 단계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 선교의 대상으로 삼고 계신 이들이 “잃어버린 양”(6절)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를 잃고 지쳐버린 상태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깊이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9:36).
그리고 선교의 구체적인 사명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 고 선포하는 것과 “치유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8절에 나열된 “병 고침”, “죽은 자를 살림”,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함”, “귀신을 쫓아냄” 과 같은 사역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그 자체입니다.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과 완전히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갑자기 예수님과 같은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1절에 “(예수님께서) 권능을 주셨다”고 나와 있듯이, 제자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님의 권능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권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닐 수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사역들이 모두 사람을 돕는 사랑의 행위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사랑의 실천, 이 두 가지가 복음선교의 두 바퀴처럼 함께 기능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9~11절에서는 선교여행을 가서 심플한 삶을 살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환자를 고쳐주었더라도 돈을 받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걱정이 되지만, 이 심플 라이프는 자신들이 하나님에 의해 길러지는 존재라고 자각하는 좋은 훈련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진지하게 기도하게 되어, 제자들에게는 보다 실천적인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8절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은 자신이 받은 은혜로 이루어진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고침”이나 “깨끗하게 함”의 사역에 따라 대가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11절부터 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선교 여행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묵을 곳이나 식사를 제공해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적합한 사람이 누구인지 잘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분별하고, 그 사람의 집에 머물며,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의 실천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는 “평화가 있기를 (샬롬)”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샬롬은 축복의 인사입니다. 그 집의 평화와 축복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사역이란 그리스도의 평화와 축복을 전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 집 사람이 거부하더라도, 그 집을 위해 기도한 그 축복은 헛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 자에게 되돌아온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즉 선교의 사역은 결코 헛수고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심판하거나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축복을 빌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4절의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라는 말씀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린다”는 이 행위는 원래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땅을 지나 성지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이방 땅의 먼지가 이스라엘 땅에 묻지 않도록 발의 먼지를 털어내던 풍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러한 전통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당신들은 하나님의 나라 밖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라는 경고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은 단순히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분명히 선언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복음을 거부한 이들에게는 소돔과 고모라가 받았던 심판보다 더 엄격한 심판이 있을 것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배 부름의 말씀으로 고린도후서 5장 20절에서 21절 말씀을 함께 봉독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0-21)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그리스도를, 나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면,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받고 우리는 의롭게 됩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으신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주어져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부디 그리스도를 나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여 평안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믿음 안에 있는 분들께서는 바울이 전하는 권면처럼 “그리스도의 사자”로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자리에서 인내와 관용, 그리고 온유함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