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年08月0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6年8月9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エレミヤ(예레미야) 17章 9~10節
〇讃 頌 讃頌歌 21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42 (詩編 98編 )
〇讃 頌 讃頌歌 285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 (마태복음)
26章 14~25節
〇説 教 「神の愛を拒んではならない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지 말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98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6年 8月 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愛を拒んではならない
マタイによる福音書 26章 14~25節
今日の聖書箇所には、イスカリオテのユダがイエスさまを裏切る場面が記されています。
ユダは、祭司長たちと銀貨30枚でイエスさまを引き渡す約束をしました。それにしても、どうしてユダはイエスさまを裏切ってしまったのでしょうか。
色々と理由は考えられますが、確かな理由は聖書に記されていません。そもそもユダは自分がイエスさまを裏切っているとは考えていなかったようです。ただ、祭司長たちに「引き渡すだけ」、その手助けをするだけだと簡単に考えていたのでしょう。仮に、イエスさまが捕らえられたとしても、イエスさまの力ならば助かるに違いないと思っていたのかも知れません。しかし、ユダの裏切りによってイエスさまは十字架につけられることになります。
何てことをしてしまったのか。ユダは自分が犯してしまった罪を赦せません。ユダは自分の行為の結果を受け入れられず自死してしまいます。つまり、ユダは積極的にイエスさまを裏切るという思いはなかったようです。
ただ、これも推測の域を超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実際のユダの思いというのは分からないのです。
エレミヤ書17章9節に「人の心は何にもまして、とらえ難く病んでいる。誰がそれを知りえようか」(エレミヤ17:9)とあります。人の心の奥底にある闇を知ることはできません。よく「自分のことは自分がよくわかっている」と言いますが、むしろ、「自分こそ、自分をわかっていない」ものです。「人間は、自分自身のことを完全には理解できない」ものなのです。人間は、状況が変われば心も揺れ、変わっていきます。状況によっては「自分がそんなことをするはずはない」ということをしてしまうことがあるのです。
ペトロだってそうです。「たとえ、みんながあなたにつまずいても、わたし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26:33)「たとえ、御一緒に死なねばならなくなっても、あなたのことを知らないなどとは決して申しません」(26:35)と言いましたが、実際イエスさまが十字架へと連れていかれるとき、ペトロは「わたしはあの人を知らない」と否定し、最後は「呪いの言葉」さえ言い出したのです。ペトロは恐怖という状況において、イエスさまを裏切ったのです。ペトロ自身、このような思いが自分の心の中にあるとは考えておりませんでした。
私たちの心の奥底には、自分でも理解できない思いがあるのです。そして、その思いを揺さぶり、神さまから離れるようにと勧めるのが誘惑であり、サタンの業なのです。
「罪」とは、私たちの心の奥底にある隙間を、誘惑によって揺さぶられ、自分の思いを超えて犯してしまうものなのです。ユダもイエスさまを祭司長たちに引き渡すことが、まさかイエスさまを十字架につけることになる、とんでもない裏切り行為とは考えられませんでした。
過越の食事をしている時に、イエスさまは「はっきり言っておくが、あなたがたのうちの一人がわたしを裏切ろうとしている」と言われました。それを聞いたユダは「先生、まさかわたしのことでは」と言ったのです。それはごまかしでも何でもありません。ユダは本当に自分のこととは考えていないのです。
ユダは、ただ心の中にある、小さな隙間、弱さをサタンにくすぐられて、行ってしまった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の心にも、このユダと同じような、心の奥底にある、自分でも理解できないような思いがあります。心の隙間があるのです。そして、それが人間なのです。
ところで、イエスさまは、ユダの心の奥底にある思い、その小さな隙間の中にある罪を知っておられました。それでもなお、イエスさまは「過越の食事」を共にしました。「過越の食事」というのは、出エジプトに由来する神さまの救いの業を覚え、家族が共に食事をしながら行う礼拝、祭りの儀式です。イエスさまはこの自分を裏切るユダを神さまの救いを覚えながら、共に食事をし、そして共に祈られた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このユダをご自身の弟子として愛されたのです。
そして、同じように、私たちを愛されておられます。これがイエス・キリスト、私たちの主であり、神さまの愛がここにあ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24節で「人の子(イエス・キリスト)を裏切るその者は不幸だ。生まれなかった方が、その者のためによかった」(26:24)と言われています。ユダの人生は、不幸な人生だったのでしょうか。
それこそ、神さまの御業のために、裏切る道を歩かされたとも言うことが出来ます。それでは、ユダは神さまの救いの御業がなされるために、まるで捨て駒のように使われただけだったのでしょうか。
私たちは、自分が「不幸だ」と思うときに、「なんで神さまは自分をこのように造られたのだろうか。自分は神さまからすれば必要のない者。自分は救いから外れ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うことがあります。
しかし、覚えておきたいことは、イエス・キリストこそが、神さまの救いの計画の中で、一番苦しまれたお方な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神さまの計画のうちに、愛する弟子たちに裏切られました。それこそ、自分がこのあとどのようになるかを理解していながら「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どおりではなく、御心のままに。」(26:39)と祈りつつ、十字架への道を進まれたのです。誰よりも、まさに捨て駒のように捨てられたのは御子イエス・キリストでした。
そして、この十字架の出来事において、傷つき、苦しんだのは、父なる神さまなのです。神さまは、御子イエス・キリストの死を持って、私たち人間を愛する道を選び取られたのです。これこそが、神さまの計画、神さまの選ばれた道です。つまり、自分自身が誰よりも苦しみに落ちていく中で、すべての者を愛し、すべての者の苦しみを担われた。すべての者を、罪から、救いの道へと導かれたのです。
しかし、残念なことにユダはこのイエス・キリストによる神さまの愛を受け入れませんでした。この後ユダは、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という出来事を神さまの愛として受け入れることが出来ず、自死の道を選び取りました。ユダが、この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を受け入れていれば、ユダは、死ではなく、悔い改めの道を選び取ることができた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ユダはその道を選びませんでした。ユダは悔い改める道、神さまの愛を受け取る道ではなく、自分の罪を自分で背負っていこうとしたのです。
皆さん、実はこれこそが本当の「神さまへの裏切り」なのです。命を懸けて、人間を救い出そうと十字架にかかられたイエス・キリストの救いを受け入れないことこそ、神さまへの裏切りであり、それこそが本当の罪なのです。
皆さんはどのような道を選び取るでしょうか。「自分は不幸だ、なんでこんなことが起こるのか」と思う時、そのように心が揺さぶられる時に、「自分は神さまから見捨てられた」「自分の罪のためにこんなことが起こるのだ」と思うのではなく、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んで下さったということを覚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を信じる道を、是非、選び取ってください。神さまの愛を受け入れてください。
今日の聖書箇所は、24章、25章、そして26章後半にある「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いう言葉に挟まれております。イエスさまは、私たちに「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教えられているのです。それは私たちの心を揺さぶる誘惑によって、神さまを忘れてしまうことのないように、神さまの救いの御業、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へといつも目を向けてい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
26章41節にはこのようにあります。「誘惑に陥らないように目を覚まして祈っていなさい。」(26:41)
私たちが陥る最大の罪の道は、誘惑によって陥る、神さまの愛を拒否するという道です。誘惑とは、いつも人間がそのように、神さまから離れることを狙っているのです。
主の祈りでは、「私たちを誘惑にあわせず、悪より救い出したまえ」と祈ります。皆さん、目を覚ましていましょう。イエス・キリストは、確かに、私たちのために十字架の上で死なれ、そのことを通して、私たちの苦しみを担う方となられたのです。
私たちは、この神さまの愛の御業を拒むことなく、忘れることなく、目を覚まして、受け取っていきたいと願います。
【2026년 8월 9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지 말라”
마태복음 26장 14~25절
오늘 본문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은 삼십에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성경은 그 확실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단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겨 주는 것”, 그 일을 조금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예수님이 붙잡히신다 해도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반드시 벗어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유다의 배반으로 인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됩니다.
유다는 자신이 얼마나 큰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하지 못했고, 자신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다시 말해, 유다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었던 것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실제로 유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어둠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은 가장 잘 안다.”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을 가장 모르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마음도 흔들리고 달라집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일을 어느 순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끌려가실 때, 베드로는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세 번이나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상황 앞에서 그는 예수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그런 마음이 자기 안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도 우리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흔들어 하나님에게서 떠나도록 유혹하는 것이 바로 시험이며 사탄의 역사입니다.
죄란 우리의 마음속 빈틈을 유혹이 흔들어, 우리의 의지를 넘어 결국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 역시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는 일이 설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엄청난 배반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유월절 식사를 하시던 중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유다는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도 아니고 둘러대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다는 자기 마음속 작은 빈틈, 연약함을 사탄이 파고들도록 내버려 두었고, 결국 그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에도 유다와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속에는 빈틈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그 작은 빈틈과 죄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와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출애굽의 구원을 기억하며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예배드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할 유다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며 식사하시고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유다를 자신의 제자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그렇다면 유다의 인생은 불행한 인생이었을까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배반자의 길을 걷도록 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단지 버려지는 말처럼 이용만 당한 것일까요?
우리도 때때로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만드셨을까?” “나는 하나님께 필요 없는 사람인가?” “혹시 나는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 가장 큰 고난을 당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반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두 아시면서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가장 버림받은 분은 유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건으로 가장 마음 아파하시고 고통을 당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깊은 고난 가운데 들어가셔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만일 유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였다면 죽음이 아니라 회개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의 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길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자기 힘으로 짊어지고 가려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것이 참된 의미의 하나님을 향한 배반입니다.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며 참된 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그렇게 마음이 흔들릴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내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24장과 25장, 그리고 26장 후반부에 반복되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유혹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언제나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26장 4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 26:41)
우리가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 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고통을 친히 담당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결코 거절하지 말고, 결코 잊지 말며, 언제나 깨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