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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12月28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12月28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38編 1~2節, 8節
〇讃    頌    讃頌歌 3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77 (ヨハネ 3章 )
〇讃    頌    讃頌歌 130
〇聖書奉読    ルカによる福音書 (누가복음)
         2章 22~38節
〇説   教    「わたしはこの目であなたの救いを見た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33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12月 2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わたしはこの目であなたの救いを見た」
              ルカによる福音書 2章 22~38節


 今日の個所では、イエスさまのご誕生から一ヶ月以上経った日の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
 マリアとヨセフは赤ん坊のイエスさまを連れて、エルサレム神殿に行きます。その目的は二つありました。一つは、出産で汚れていると見なされた母親マリアを清めるためです。そして、もう一つは、初めての子どもであるイエスさまを神さまに献げるためです。献げると言っても、銀五シェケル(20デナリ)の贖い金を神殿に支払う規定となっておりました。


 ヨセフは律法を忠実に守っておりましたから、家計の苦しい中、無理をしてでも、マリアのための二羽の鳩、イエスのための20デナリ(10万円から20万円ぐらいか)を神殿に献げようとしました。
 当時のユダヤ社会は、神殿貴族を中心にしたピラミッド社会です。祭司は特権階級、利権の頂点にいます。宗教的に真面目に律法を守る者が、社会的にさまざまの税金を搾り取られる仕組みがありました。それがどれだけ家計を苦しめていたか。それでもヨセフ一家は、律法に忠実に生きようとしていました。
 ユダヤ人たちを苦しめていたのは、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ローマ帝国の人頭税や通行税というものもあり、それを徴税人たちが徴収していました。まさに植民地ユダヤは重税社会であったのです。ヨセフはそういった規則を律儀に守るタイプの「正しい人」でした。真面目な人ほど損をするという社会の被害者です。


 さて、エルサレムに、ヨセフと同じタイプの「正しい人」がいました。シメオンという男性です。彼は、聖霊からのお告げを受け、聖霊に導かれて生きており、神さまからの約束に希望をおいて生きていました。その約束というのが「主が遣わすメシア(キリスト)に会うまでは決して死なない」という約束です。この「キリストの会う」というのは、目に見えない神さまを目で見る」という恵みです。ユダヤ人たちは神さまを見ると死ぬと考えていました。それでも、シメオンは神さまを見た瞬間死ぬことを覚悟してこの恵みを待ち望んでおりました。


 その彼が、赤ん坊のイエスさまを見た瞬間、イエスさまがメシア、救い主、神さまだと分かりました。神さまが約束を果たしてくれたことに、彼は感謝しました。それと同時に死なない自分がいることにも気づきました。その時、彼の固定観念が壊されます。おそらく律法を律儀に守るユダヤ人シメオンは、ごちごちの民族主義者でした。ある意味、シメオンは、ユダヤ人たちの固定観念に囚われておりました。イエスさまに会う前、彼の希望は「イスラエルの慰め」(25節)に限られていました。神さまの祝福は、イスラエルのみの救いという固定観念があったわけです。でも、実際、主が遣わされたメシア、イエスさまに出会った時に、彼の固定概念が崩されたのです。


 シメオンの行動は、今までの律法通りの真面目な振る舞いを打ち破るものでした。彼は、両親から赤ん坊のイエスさまを取り上げ抱っこし(28節)、祭司に献げられる前に、一家を祝福します(34節)。シメオンは祭司でもなんでもないのに、祭司になるのです。
 また、シメオンは喜びの中、このように神さまを讃美しています。30節です。「わたしはこの目であなたの救いを見たからです。これは万民のために整えてくださった救いで、異邦人を照らす啓示の光、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の誉れです。」(30-32節)


 シメオンは、イエスさまを見るまで、イスラエルという狭い概念の中で、神さまの慰め、救いというものを考えておりました。それが実際にイエスさまを見ると、キリストは世界の救い主であると分かったのです。「救い」は「万民のために整えてくださった救い」(31節)です。イスラエルの慰め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は異邦人を照らすための光なのです。それゆえに、イスラエルの誉れなのです。
 ここにシメオンの信仰の変化が見られます。大きく成長していると言っていいでしょう。シメオンはイエスさまを通して、世界の人々が救われることを待ち望む人となったのです。


 それでは、イエスさまが世界の人々にもたらす救いとは何でしょうか。それは、イエスさまが神さまに棄てられ、エルサレムで神殿貴族たちやローマ帝国軍に殺されること、そのイエスさまを神さまが三日後に甦らせること、そのイエスさまと神さまが聖霊をすべての人々に与えること、この一連の事柄が世界の人々の救いへと繋がっていきます。


 これらの出来事は、多くの人々の心を刺し貫きました。イエスさまを見捨てた弟子たちの恐怖、イエスさまを最後まで見守った弟子たちの失望、ローマ総督の後悔、ローマ兵の懺悔、ユダヤの神殿貴族であったヨセフがイエスさまを埋葬するなど、多くの人がイエスさまの死を悼みました。
 しかし、一方で、世界の全ての人々に「自分もイエスさまを十字架につけた同じ罪を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が示されました。十字架でイエスさまの身体が刺し貫かれた時、全ての人々の良心が刺し貫かれたのです。それゆえに、私たちはこの十字架の前に「この不条理な世界でどのように生きるべきか」と、問われてい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十字架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見上げながら、もう一度、自分が死なずにイエスさまが死ぬことの意味を問い直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私たちが十字架の前にぬかずくならば、神さまが私たちを立ち上がらせてくださるのです。それが復活と聖霊の働きです。悔い改めという生き方の転換が、聖霊を受けることによってなされます。


 シメオンがその具体例だったのです。狭い考え方が、赤ん坊のイエスさまを見たときに打ち砕かれ、より広い救いへと目が開かれました。彼は死を覚悟したけれども、新たに生かされ、別の生き方を歩み始めました。その最初の行動が、清める権限を持つ祭司でもないのに、汚れているはずのマリアを祝福しました。なぜなら、神さまが清いと言っているのに汚れていると決めつける狭い生き方から解放されたからです。


 洗礼を受けてキリスト者となるということは、狭い固定観念が打ち砕かれ、自由な生き方を選ぶということです。聖霊に導かれる人生とは、この不条理が横行する世界の中で、神さまから自由を与えられ、自分の自由を広げていく生き方を地道に続ける人生なのです。


 それから、シメオンとイエスさま、また、マリアとヨセフの四人に、84歳の女性が近づいてきました。アンナという預言者です。彼女は「アシェル族のファヌエルの娘」(36節)と紹介されています。アシェル族はイスラエル十二部族の一つではありますが、イエスさまの時代、この部族は存在しておりません。アシェル族が住んでいた地域は異邦人の地となっていました。ですから、彼女はユダヤの血筋でありながらも異邦人の扱いを受けていた預言者と言えます。


 ここには、イエスさまを中心とする五人が神殿の境内に集まっていることになりますが、赤ん坊と若い夫婦、それに高齢男性と異邦人のような高齢女性という多様性がここにあります。赤ん坊のキリスト、祭司、預言者という多様性もあります。ガリラヤの人とエルサレムの人と異邦人という多様性もあります。
 この集まりは教会の原型と見ることが出来ます。そこでは、祝福をし、預言をし、断食をし、祈り、賛美をし、救いを待ち望んでいる人々に幼子のことを話していました。(37-38節)


 現代の教会の原型もここにあります。そこには多様性をもつすべての人々が招かれており、お互いの祝福や共同の賛美、祈り、宣教がなされるのです。
 皆さん、これからも広島教会は、多様性をもつ者たちが、その出自や背景、国籍を越えて、イエス・キリストを中心に集まり、神さまからの祝福を分かち合うために、来年もまた、神の御言葉を聞き、讃美と祈りを献げながら宣教に励んで行きましょう。


【2025년 12월 28일 주일예배(요약판)】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 
                               누가복음 2장 22~38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뒤의 일을 전해줍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그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출산으로 인해 부정하게 여겨졌던 어머니 마리아를 정결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첫아들인 예수님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바친다’고 해도, 규정에 따라 은 다섯 세겔(약 20데나리온)의 속전을 성전에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율법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이었기에,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무리를 해서 마리아를 위한 산비둘기 두 마리와, 예수님을 위한 20데나리온(오늘날 가치로 약 10만~20만 원 정도)을 성전에 바치려 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성전 귀족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였습니다. 제사장들은 특권 계층이었고, 종교적으로 성실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각종 세금과 부담을 떠안는 구조였습니다. 그것이 가계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의 가정은 율법에 충실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유대인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인두세와 통행세도 있었고, 세리들이 이를 거두어 갔습니다. 식민지 유대 사회는 그야말로 중과세 사회였습니다. 요셉은 이런 규칙을 꼬박꼬박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성실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사회의 한 피해자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요셉과 같은 유형의 또 다른 ‘의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시므온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계시를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살며, 하나님의 약속에 소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 약속이란 “주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자신의 눈으로 본다는 은혜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믿었지만, 시므온은 하나님을 뵙는 순간 죽을 각오로 이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보는 순간 그는 그분이 메시아요, 구원자요, 하나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 주셨음에 감사하면서도,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순간, 그의 굳어 있던 고정관념이 무너집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던 유대인 시므온은 아마도 강한 민족주의자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의 소망은 “이스라엘의 위로”(25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을 직접 만났을 때, 그 고정관념은 완전히 깨졌습니다.


  시므온의 행동은 기존의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태도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모의 손에서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28절), 제사장에게 드려지기도 전에 그 가정을 축복합니다(34절). 시므온은 제사장이 아니었지만, 제사장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쁨 가운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30-32절)
  시므온은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틀 안에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구원은 “만민을 위하여 예비된 구원”(31절)이며, 예수님은 이방인을 비추는 빛이시기에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므온의 믿음이 크게 성장했음을 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온 세상이 구원받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가져오신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아 예루살렘에서 성전 귀족들과 로마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시며,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성령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신다는 이 일련의 사건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세상의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이 사건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의 두려움, 끝까지 지켜본 제자들의 절망, 로마 총독의 후회, 로마 병사의 참회, 그리고 유대의 성전 귀족이었던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 지낸 일까지-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나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이다”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찔릴 때, 모든 인간의 양심이 함께 찔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내가 죽지 않고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그 의미를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그것이 부활이며, 성령의 역사입니다. 회개라는 삶의 전환은 성령을 받을 때 가능해집니다.

  시므온이 바로 그 구체적인 예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난 순간, 그의 좁은 사고방식은 깨지고 더 넓은 구원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각오했지만, 오히려 새롭게 살아나 다른 삶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행동이, 정결의 권한도 없는 자신이 부정하다고 여겨지던 마리아를 축복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 하신 것을 더 이상 부정하다고 규정하지 않는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좁은 고정관념이 깨지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인도받는 삶이란,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받아 그 자유를 넓혀 가는 삶을 묵묵히 이어 가는 인생입니다.


  그때, 시므온과 예수님,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에게 한 노여인이 다가옵니다. 여든네 살의 여선지자 안나였습니다. 그녀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36절)로 소개됩니다. 아셀 지파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하나였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그 땅은 이방인의 지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안나는 유대 혈통이지만 이방인처럼 취급받던 예언자였습니다.


  이 장면에는 아기 예수님과 젊은 부부, 노년의 남성과 이방인처럼 여겨진 노년의 여성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아기 그리스도, 예언자,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다양성도 보입니다. 갈릴리 사람, 예루살렘 사람, 이방인이라는 다양성도 있습니다.
  이 모임은 교회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축복과 예언, 금식과 기도, 찬양이 이루어지고, 구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아기에 대한 증언이 전해졌습니다(37-38절).


  오늘날 교회의 모습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초대되어 서로를 축복하고,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도 히로시마 교회가 출신과 배경, 국적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는 공동체로서, 새해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찬양과 기도를 드리며 선교의 사명을 계속 감당해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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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12月28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