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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年03月02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2025年3月2日 主日礼拝 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ブ記(시편) 42章 4~6節
〇讃    頌    讃頌歌 20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7 (詩編 29編)
〇讃    頌    讃頌歌 79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9章 1~8節
〇説   教    「罪を赦すキリストの権威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위)」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72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交 わ り    
〇頌  栄    讃頌歌 6
〇祝   祷


※ 説教映像をYouTubeでご覧いただけます。


【 2025年 3月 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罪を赦すキリストの権威」
                 マタイによる福音書 9章 1~8節


 今日の聖書箇所は、イエスさまが「中風の人を癒やす」話です。8章にも中風で家に寝込んでいるローマ軍の百人隊長の僕を癒やす話がありました。「百人隊長の僕の癒やし」では、イエスさまの権威を信頼する百人隊長の信仰に焦点が当てられておりました。今回の「中風の癒やし」ではどうかと言いますと、マルコによる福音書2章とルカによる福音書5章にもあり、そこを見ますと、イエスさまがいる家に大勢の人が押し寄せ、イエスさまに近づくこともできないので、四人の男の人が中風の人を屋根の上まで運び、屋根を剥がして、吊り下ろしてまで、イエスさまに癒やしを求めた、その人たちの信仰のことに焦点が当てられておりますが、マタイによる福音書では、2節に「その人たちの信仰を見て」とありますが、「その人たち」すなわち中風の人を連れてきた人たちの苦労や熱心さなど、そういったことはすべて省略されています。マタイによる福音書においては、人々の信仰やそれに伴う癒やしの業よりも2節の「子よ、元気を出しなさい。あなたの罪は赦される」と言われた「罪の赦しの宣言」に焦点が当てられております。


 今日は、「罪を赦すキリストの権威」についてお話しようと思います。
 当時のユダヤ社会において、病気や災いといったものは、本人か誰かの罪に対する神さまの罰であると信じられていました。ですから、この病人、中風の人を見ている周りの人たちは、この病人を罪人として見ていたわけです。
 そんな彼にイエスさまは「子よ」と呼びかけられました。イエスさまのこの呼びかけは、周囲の注目を浴びることになります。そして、イエスさまは「あなたの罪は赦される」と赦しの宣言の言葉を語ったのです。


 それを聞いた律法学者は「この男は神を冒涜している」と心の中で考えたと言います。罪の赦しは神さまの権威に関わることです。人間に赦され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律法学者がそのように考えたのは当然の話です。
 しかし、イエスさまは律法学者に「なぜ、心の中で悪いことを考えているのか」(4節)と批難し、「『あなたの罪は赦される』と言うのと、『起きて歩け』と言うのと、どちらが易しいか」(5節)と、質問されました。


 皆さんは、どちらが易しいと思われますか。普通に考えたら、病気を癒やすことより「あなたの罪を赦す」と言う方が易しいと思います。例えば、牧師である私が「罪の赦しの宣言」と「癒やしの宣言」をする場合、もし、癒やしの宣言をするならば、その目に見える結果が求められます。病気が少しもよくならないとなれば、信用を失ってしまいます。でも、「罪の赦しの宣言」というのは、魂の領域、目に見えない領域のことですから、それは「信仰の問題だ」ということで片付きます。ですから、言うだけなら、「罪の赦しの宣言」をする方が易しいとなります。
 しかし、より深いレベル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しかも、律法学者たちがどう見るかという文脈の中では、「起きて歩け」と言うことの方が易しいわけです。「罪の赦しの宣言」は、当時のユダヤ社会では、神さまを冒涜したとして見做され、死罪に当たります。実際、イエスさまはこの後、律法学者や祭司長たちによって、十字架刑に処せられることになるわけで、イエスさまのこの「罪の赦しの宣言」は、まさに自らの命を懸けた宣言であったわけです。


 しかも、この「どちらが易しいか」という問いは、神さまにとってどちらが易しいのかということも考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さまの権威からすれば、悪霊を追い出すことも病を癒やすことも簡単になされるでしょう。しかし、罪の赦しは、神さまが心の中で赦そうと思えば、罪の赦しの宣言をすれば良いという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と人間との関係が回復するものではないと言うことです。そこには確かなる確約が必要であり、そのために神さまは愛する独り子イエス・キリストをこの世にお遣わしになり、そのキリストを十字架に架けることによって、その死をもって、人間の罪の贖いとして、神さま自ら代価を払ってくださったと言うことです。


 ですから、「あなたの罪は赦される」という宣言は、そんなことを口にするなんて、という驚きの宣言でありました。こんなことを口にするイエスとは一体何者なのか?
 イエスさまはこれまで病を癒やし、自然界を静め、悪霊を追い出し、ご自身の神性というものを証明して来ました。そして、ここでは、罪の赦しということにおいて、ご自身が何者であるかを明らかにしようとされているのです。


 律法学者が何も答えることが出来ないまま、イエスさまは中風の人に「起き上がって床を担ぎ、家に帰りなさい」(6節)と言われ、中風の人は、イエスさまの言葉通り、起き上がり、家に帰って行きました。「あなたの罪は赦される」と「起きて歩け」という、この両方が、イエスさまにとっては易しいと言わんばかりに、この両方の言葉を実証してしまいます。ここにイエスさまの権威のすごさがよく表れております。


 イエスさまは、この時、「人の子が地上で罪を赦す権威を持っていることを知らせよう」(6節)とはっきりと言われております。2節に「その人たちの信仰を見て」とありましたが、「その人たち」というのは、中風の人を連れて来た人たちだけでなく、中風の人を罪人として見ていた人たちや律法学者を含めた群衆も意味しているだろうと思います。神さまが何を願い、何を人に求めているのか、少しも理解していない人たちのことです。まさに私たちのことでありますが、この私たちに対して、「あなたの罪は赦される」「起き上がって歩け」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の癒やし御業というものは、神の支配、神の国到来の御業です。それはイエスさまがキリストであり、神さまであることの証明でもあります。群衆はその御業を目の当たりにします。しかし、彼らの反応は、「恐ろしくなり、人間にこれほどの権威をゆだねられた神を賛美した」(8節)ということでした。
 「恐ろしくなり」「神を賛美した」。群衆は必ずしもイエス・キリストに対して良い感情を持つ者たちばかりでは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群衆は畏敬の念にとらわれ、神さまの御臨在を感じ、神さまを賛美せざるを得ませんでした。
 皆さんはどうでしょう。イエス・キリストを差し示す十字架の前に、今、座っておられますが、このキリストの前に畏敬の念をもって、賛美しているでしょうか。


 皆さん、私たちのために十字架にかかってくださった主イエス・キリストに感謝して、今、罪赦されている恵みを確かに受け止めて、御言葉が導いてくださる方向に、また今日から共に歩み始めたいと願います。


【2025년 3월 2일 주일예배(요약판)】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위”
                                마태복음 9장 1~8절


 오늘의 성경 본문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이야기입니다. 8장에도 중풍으로 집에 누워 있는 로마군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는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의 권위를 신뢰하는 백부장의 신앙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이번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야기”는 마가복음 2장과 누가복음 5장에도 나와 있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님이 계신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자 네 명의 남자가 중풍병자를 지붕 위로 데리고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그를 내려 놓으면서까지 예수님께 치유를 요청한 그 사람들의 신앙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2절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나와 있지만, “그 사람들” 즉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고생이나 열심 등은 모두 다 생략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사람들의 신앙이나 그에 따른 치유의 역사보다 2절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죄의 용서 선언”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오늘은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질병이나 재앙 같은 것은 본인이나 누군가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병자, 중풍병자를 보고 있는 주위 사람들은 이 병자를 죄인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야” 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부름은 주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용서의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신성(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권위와 관련된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서기관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4절)고 비난하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5절) 라고 물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병을 고치는 것보다 “당신의 죄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이 쉬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인 제가 “죄의 용서 선언”과 “치유의 선언” 중에서 만약 치유의 선언을 한다면 그 때는 눈에 보이는 결과가 따라와야 할 것입니다. 가시적으로 병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신용을 잃게 됩니다. 하지만 “죄의 용서 선언”은 영적인 영역,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것은 “신앙의 문제”로 정리됩니다. 그래서 단순히 말하는 것만으로는 “죄의 용서 선언”을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 됩니다.
 하지만 더 깊은 수준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구나 서기관들이 어떻게 보느냐 하는 맥락 속에서는 “일어나서 걸어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쉬운 셈입니다. “죄의 용서 선언”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을 모독한 것으로 간주되어 사형에 해당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후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죄의 용서 선언”은 바로 자신을 희생하면서 목숨을 건 선언이었던 셈입니다.


 게다가 이 “어느 쪽이 더 쉬운가” 라는 물음은 하나님에게 어느 쪽이 쉬운가 하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에서 보면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병을 고치시는 것도 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마음속으로 용서하고자 하시고 죄의 용서 선언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확실한 확약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그 죽음으로 인간의 죄의 속죄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대가를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선언은 그런 말을 하다니, 라는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예수는 도대체 누구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병을 치유하시고 자연계를 잠잠하게 하시며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자신이 신성이라는 것을 증명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죄의 용서라는 문제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히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6절)고 말씀하셨고,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와 “일어나 걸어가라”는 이 두 가지 모두가 예수님에게는 쉽다는 듯이 이 두 가지 말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권위의 대단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6절)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2절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했는데, “그들”이라는 것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풍병자를 죄인으로 보았던 사람들이나 서기관들을 포함한 군중도 의미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무엇을 사람에게 원하시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서 걸어가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하나님의 지배, 하나님의 나라 도래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 사역을 눈앞에서 직접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8절) 라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진 자들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외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십자가 앞에 지금 앉아 계시지만, 이 그리스도 앞에서 경외심을 가지고 찬양하고 계신가요?


 여러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리며, 지금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은혜를 확실히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다시 오늘부터 함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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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稿日:2025年03月02日